아버지에게 보여드리지 못한 시
아빠가 되고 나니 아빠가 보고 싶다
허수아비
박희종
아버지를 닮았다.
논 한가운데 서서
지키는 것이
아버지를 닮았다
새들의 부리에
여기저기 상처 나고
구멍 난 옷이
아버지를 닮았다.
뜨거운 태양에
바래버린 색이
아버지를 닮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 옷을 입었다.
어린 시절 커다란 등이 입고 있던
아버지 옷을 입었다.
아버지를 닮았다.
작아진 등이
패인 상처가
빛바랜 색이
흔들리는 옷깃이
아버지를 닮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백일장에 나가 입상을 했던 작품이다. (주최했던 협회에 문의하여 출품했던 작품을 받고 싶었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폐기를 해서 받을 수는 없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작품이다. ) 큰 기대 없이 바람이나 쐬자며 나간 백일장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입상을 하게 되어 학교에서도 교장선생님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상을 받아오던 날. 어머니는 아주 많이 좋아하셨다. 원체 리액션이 좋으신분이기 때문에 나 역시 기분은 좋았지만, 내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워낙 말수가 적으시고 감정 표현이 많지 않으셨던 분이셔서 웬만한 일에는 크게 칭찬을 하시는 일이 없으셨는데 그날은 정말 활짝 웃으시며 칭찬해 주셨다.
아버지는 국문과를 나오셨다. 1941년생이셨던 아버지 시대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국립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신 것은 누구보다 큰 스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스펙은 오히려 아버지의 인생의 발목을 잡았다. 교사가 되고자 했던 꿈도, 군 장교가 되려던 계획도 틀어지게 만들었다. 그 당시의 집안 어르신들께서는 대학까지 나온 장손이 선생질을 하는 것이나 직업 군인이 되는 것이 싫으셨던 것 같다. (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에 우리 아버지가 선생님이 되셨다면 지금쯤 연금이나 받으면서 편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농담 섞인 푸념을 하곤 한다. )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인생은 순탄치 않아서 이 직장 저 직장을 옮겨 다니시다 결국은 친한 친구에게 사기까지 당하고 집에서 쉬시게 되셨다. 내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때가 그쯤이었다. 아버지로서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많이 지치고 힘이 드셨던 시기. 그때 늦둥이 막내아들이 전국 백일장에서 상을 타 온 것이다.
나에게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따뜻하고 멋진 분이시다. 비록 경제적 능력은 부족하셔서 어머니와 가족들을 힘들게 하시긴 했지만, 적어도 나는 생활력이 탁월하신 어머니 덕분인지 경제적으로 무능하셨던 모습보다는 따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집에 계시던 시절. 학교에서 집에 오면 아버지가 계셨다. 그럼 매일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비디오에 녹화해 놓으신 명작 영화들을 보여주셨다. 그때 본 작품들이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벤허], [찰리체프린],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영화의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쉽게 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로마의 휴일]과 [사운드 오브 뮤직]이 빠지지 않는다. (요즘에는 우리 딸을 재울 때 "에델바이스"를 불러준다.)
프로야구 시즌이면 해태팬이셨던 아버지는 선수들의 특징들까지 설명해 주시면서 아들과 함께 야구를 보는 걸 좋아하셨고(아버지랑 야구를 같이 보지 않게 되면서 프로야구에 관심이 없어졌다.), 사극을 보며 역사를 설명해 주시거나 주말의 명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들이다. 특히, 아버지가 가끔씩 일을 나가시게 되면 (그 당시 길게는 일을 안 하셨지만 몇 달씩은 일을 하시곤 하셨다.) 월급날은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표정으로 오셔서 10만 원씩 척 용돈을 주시기도 하셨다. 그 당시에 학생들에게 10만 원이라는 돈은 정말 컸다. (생각해보면 여유롭지 않던 형편에 그렇게 용돈을 주시는 아버지를 말리지 않으시고 용인해주신 어머니도 대단하신 것 같긴 하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던 나를 위해 가끔씩 퇴근길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러서 돈을 맡겨 주신곤 했다. (그 당시에는 비디오 가게에 선불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우리 아들 누군지 알죠? 우리 아들이 빌리러 오면 돈 받지 말고 빌려주세요"
늦둥이 막내아들이 그리 좋으셨는지 아니면 자신을 닮은 외모에 더 끌리셨는지 무심히 툭툭 던져 주셨던 아버지의 사랑은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런데 그런 막내아들이 시를 써서 상을 받아 온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좋으셨는지 많이 대견해하시고 크게 칭찬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셨다.
" 무슨 작품을 썼니? "
" 아 별거 아니었어요. 나중에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그때 보여드릴게요 "
난 보여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작아진 모습에 대한 시를 아버지에게 차마 보여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황을 넘기고 나서는 상장을 자랑스럽게 내 책상 유리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명절 때마다 그 상장을 보시는 친지분들은 대단하다는 칭찬과 함께 어떤 시를 썼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는 각종 핑계로 아무에게도 보여드리지 않았다. (실제로 상은받았지만 시는 보여드리기 싫어서 원작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 시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능으로 받은 상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절대 보여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나와 아버지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딸과의 나이차이가 많은 늦깎이 아빠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재능이 할머니에게서 왔듯이(실제로 우리 할머니도 내가 상을 받았을 때 불교 교지에 기고하던 수필이 담긴 책을 10권이나 가져다주셨다) 나의 딸도 그 재능을 이어받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딸도 나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나는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아빠의 넓은 등을 보여줘야겠다. 그래서 나의 딸이 나에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때 나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글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버지가 그리워질수록 이 시가 점점 더 미안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