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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 볼펜의 일생

어른들의 동화-둘

by 박희종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조금만 더 건방지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나를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난 그만큼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비교가 안 되는 나의 효율성일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저렴하고 누구보다 심플하다. 열개씩 묶어서 포장되어 있다는 것도 급하게 볼펜이 많이 필요한 순간에는 유용하다. 심지어 빨간색과 파란색까지 있으니 솔직히 경쟁상대가 없다. 물론 나의 변을 가끔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불만도 내 가격 앞에서는 찍소리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하다. 그 이유는 아무도 나를 끝까지 쓰지 않는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무도 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빌려가거나 어디에다 두고 와도 굳이 찾지 않는다. 열개들이 한 상자를 사서 서랍에 두고서 자기도 모르게 한두 개만 남아있어도 어디다 쓴 건지 누가 가져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익숙한 만큼 존재감도 없다. 그러니 보통 우리들의 일생은 그 끝이 더 초라하다. 대부분의 경우는 서랍 안이나 연필꽂이에 놓여 있다가 대청소를 하거나 이사를 가게 되는 순간 버려진다. 다행히 버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꽤 오랜 시간 종이와 만나지 못하고 쓸쓸하게 굳어지는데 그마저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소원은 딱 한 가지다.


끝까지 쓰이는 것

더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다 써보는 것


내가 비록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버려지는 것이 당연할 수는 없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잉크가 다 쓰이기 위해 태어났고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나를 포기한다.

나에게도 과거의 영광은 있었다. 침을 발라가며 거친 종이를 채워가던 시절. 혹여나 잃어버릴까 소중하게 담겨 다니던 시절. 심지어 내수명이 다한 후에도 연필의 짧은 몸에 이식되어 연필의 삶까지 함께 살았던 시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났을 뿐.


나는 믿는다. 어딘가에 아주 사소한 나이지만 끝까지 다 써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역할이 끝나도 그 사람의 꿈은 지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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