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아직 개월로 셀 무렵, 디즈니 공주님이 입을법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아기 땐 통과의례처럼 그런 걸 다들 하는 모양이었다. 미니 면사포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 “카메라 아저씨 보면서 웃어보자~” 하면 배시시 웃어 엄마 아빠의 박수갈채를 받는 날.
정작 당사자는 기억이 없지만,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내 사진에다 시침 분침을 꽂아 만들어놓은 벽시계를 엄마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20년 만에 처음으로 드레스 입을 일이 생겨버렸다. 아주 형식적인 저녁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먹으며 처음 본 사람들과 와인잔을 부딪히는 저녁, *개스크였다. 포크가 몇 개인지, 건배는 어떻게 하는지, 전채요리와 메인 디시 사이엔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까지 전통으로 정해진 파티. 우연인지 운명인지 개스크가 다가올 무렵 같은 *코리도에서 기숙사 방을 나간 미아 Mia가 선물이라고 주고 간 한 무더기의 드레스들이 옷장 저 구석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 제일 파격적인 이 옷을 입고 나가기까지 장장 3일간 저녁을 굶었다. 엉덩이부터 등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지퍼가 허리께에서 막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왕 목이 훤히 보이는 옷을 입는 거 쇄골도 좀 보였으면 했다. 희미한 쇄골이 보이고 팔뚝살이 도드라지지 않는 포즈를 3일 밤낮으로 연습했다.
수 백번도 넘게 드레스를 입고 벗고, 구두를 신어보고 단화를 신어봤다. 머리를 묶어보고 풀어도 봤다. 같은 코리도에 사는 스코틀랜드 친구 에비 Abby에게 드레스를 뭉텅이로 들고 가 빨간 드레스를 입을까 까만 드레스를 입을까 온 저녁 내내 그녀를 귀찮게 했다. 하루 저녁을 이토록 기대하며 준비한 적이 있었나. 내 평생 이렇게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미고 나간 적이 있었나! 영하 15도의 눈길에 파티장에 가야 하는 바람에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외투를 입고 미끄러지지 않는 부츠를 신어야 한다고 괜히 투덜댔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내 이름으로 예약된 자리, 서너 개의 와인잔과 크기별로 놓인 포크와 수저, 영화에서만 보던 파티!
국제학생 개스크 international gasque 답게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의 국적이 다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근사하게 빼입고 온 데는 차이가 없었다. 남자는 슈트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 혹은 보타이를 맸다. 여자는 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그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남녀가 긴 테이블에 주르륵 앉았다.
나는 미국에서 왔어,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왔어,
나는 한국에서 왔어.
미국에서 온 남자애는 ‘그 유명한 스웨덴 개스크’에 참석하기 위해 슈트 한 벌을 집에서부터 가져왔다고 했다. 그 옆에 앉은 여자애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를 찾느라 중고 빈티지샵을 다 뒤졌다고 했다. 나는 같은 코리도 옆방에 있던 친구가 이사를 나가며 물려준 드레스를 입었다고 했다. 근사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초반의 어색함도 잠시 다들 너털웃음을 지었다.
개스크 티켓을 사던 날 개스크 준비 위원회는 미리 참석자들의 식성을 조사했다. 채식주의자인지 그렇지 않은지, 와인을 선호하는지 무알콜 사이다를 선호하는지. 그렇게 각자의 선호 맞게 준비된 전채요리와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세 개의 메뉴가 세 시간에 걸쳐 나왔다. 올라가지 않는 지퍼를 올리려고 하루 종일 굶고 온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적은 양의 음식들. 파티 내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렇지만 불평불만 대신 호호호 웃으며 말했다.
“여기 정말 음식이 정성 들여 준비되는 모양이야”
식사 중간중간 알 수 없는 스웨덴어의 노래를 눈치껏 따라 부르고, 주위 친구들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오늘만큼은 이런 식사자리가 익숙한 것처럼 놀아보려고 했는데, 사진 속 어색한 표정을 보니 그렇게 보이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오늘이 좋았다. 헐렁한 청바지에 티셔츠 정도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릎에서 찰랑이는 드레스를 입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잘 익은 김치를 쪽 찢어 뜨신 밥에 올려먹고만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내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코스 요리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아무래도 아직 알아갈 게 많은 사이인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 알아간다.
빨간 드레스와 지루한 코스요리를 좋아하는 사람.
아주 가끔은.
*[개스크 Gasque]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격식을 갖춰 저녁식사를 하는 스웨덴 전통행사. 노래와 웃음과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코리도 Corridor]
방과 화장실은 따로, 주방을 함께 쓰는 기숙사 flogsta에서 하나의 주방을 공유하는 열두 개의 방을 묶어 코리도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