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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21. 2020

세상은 하얗고 우리는 예뻤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먼 나라에 와 있으면 쓸데없이 조급해지곤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주위의 교환학생들 때문이다. 아직 시차를 극복하지 못한 나는 적응하기만도 바빴는데, 언제 그렇게들 계획을 짰는지.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이 몰려있던 학기의 첫 주가 끝나자마자 속속들이 짐을 싸 스웨덴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져 스카이스캐너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티나 Tina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뭐해? 눈 구경하러 가자!"




경제사 첫 수업이 있던 날, 기숙사 플록스타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홍콩에서 온 그녀를 처음 만났다. 웁살라는 도시 전체에 학교 건물이 흩어져있어, 강의실은 고사하고 강의동을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분명 구글맵이 6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데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또래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쪽도 6번 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긴가민가한 모양이었다. 두꺼운 패딩에 부츠와 장갑까지 꽁꽁 싸매고서는, 핸드폰과 정류장 표지를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거리는 모양이라니. 같은 처지를 발견한 반가움에 무작정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너도 수업이 경제관 ekonomikum이야? 우리 같이 갈까?"


영하 15도의 날씨에 주렁주렁 콧물을 매달고 손바닥만 한 핸드폰에 의지해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서로가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첫 수업에 지각을 확신하고, 도대체 어느 정류장인지 알 수없어 마음이 급해지는 와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를 애태운 경제관 ekonomikum



같은 시간, 같은 강의동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종종 수업이 끝난 뒤 같이 장을 보기도 하고,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워지는 날엔 함께 요리를 했다. 눈 구경하러 가자는 뜬금없는 전화가 그토록 반가웠던 건, 이 사람이 아주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까짓 우리도 가보자.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다.

어디든 좋아, 어디든 가보자.



      

기숙사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고작 20분 남짓 달렸을 뿐인데, 가닿은 곳엔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스웨덴에 도착해서 줄곧 봐온  눈인데, 서울에도  많은 눈이 내리는데, 나에겐 눈이 낯설지 않은데, 처음 보는 눈이었다. 하늘이 하얗고, 세상이 하얬다.  세상의 눈을  모아놓은  같았다.  색깔을 가진  우리뿐인  같았다. 아니, 우리의 색마저 다 사라질 듯한 세상이었다. 끝없이 넓은 들판과  위에 두텁게 쌓인 ,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얗게 빛나는 .


태어나서 눈을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신나게 뛰어노는 우리의 뒤로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에서의  그리고 홍콩에서의 . 서로 다른 세상이 부딪혔다. 우린 우리가 살아온 시스템을 비판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홍콩의 집은 꼭 닭장 같아.’

‘한국의 사람들은 집을 갖는 게 꿈이야.’

‘우린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해야만 해. 대학은 우리의 전부였어.’

‘하지만 직업을 갖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스웨덴에서 보낸 우리의 일주일이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다름.  다름의 크기.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냈는데, 그런 삶만 있었던  아니라는  알아차리는 데에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최저임금이 아주 높은  나라에서 직업의 귀천은 찾아볼  없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인식이 그랬고 현실이 그랬다. 정규직 하나를 보고 달려온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아까울 만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만났다.  앞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우리는 복잡했다. 집에 돌아갈 때쯤엔 우리가 그린 삶의 모습이 아주 많이 달라질 것도 같았다.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름 모를 동네를 신나서 뛰어다니던 우리는 예뻤다.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얼마큼이나 다른 삶을 가져갈지 상상하며 행복했다. 지금의 우리를 평생 동안 그리워할 것도 같았다. 앞으로의 삶을 함께 고민하던 서로가 있던 지금을.



걷고 또 걸었다. 이 눈길을 언제 또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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