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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17. 2020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다른 거겠지


타지 생활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물건을 물려받을만한 사람이 없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환학생 제도가 빛을 발한다. 학교 국제처를 통하면 메일 주소 정도는 반나절이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학교 학우가 파견 직전학기에 다니고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우리 대학에서는 통상적으로 한 학기에 2명을 웁살라대학교에 파견했다. 운이 좋게도 18년 가을학기에 2명의 여학우(심지어 이름이 같은!)가 교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불솜부터 베개커버, 세제, 화장실 슬리퍼, 심지어는 쓰레기봉투까지 좋은 가격에 넘겨받게 되었다. 파란 이케아 쇼퍼백에 내게 넘겨줄 물건을 꽉꽉 채워 넣은 사진을 받고, 웁살라에 도착하면 내게 물건을 대신 건네줄 친구의 연락처까지 받아놓았다. 살림살이의 절반 이상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준비된 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살림살이에 덤으로 친구 하나를 사귀게 될지도 모른다. 아주 아주 훌륭한 친구를.          


(me) “안녕! 어제 스웨덴에 도착했어. 네가 물건들을 대신 보관해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찾으러 가도 될까?”

(Abeer) “물론이지. 네 물건들은 내 방에 있어.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챙겨줄 게 많아. 네가 이쪽으로 와줄래? 차 한 잔 하자!”       


Abeer내게 물건을 넘겨준 학우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이집트 출신 대학원생이었다. 마치  번이나 만났던 사이처럼 나를 맞아주는 미소가 따듯했다. 상큼한 향이 나는 과일차  잔을 두고 마주 았다.


우리는 ‘이런 우연 핑계로 금새 가까워졌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는  스웨덴에 왔어? 너는 무슨 공부를 하고 있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야? 내가 눈동자를 굴리며 답을 찾는 사이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맥주    beer 이름에 들어간다며 외우기 쉽지 않느냐며 깔깔 웃던 Abeer 이집트에서 치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치과에서 일했다. 높은 학력에 솜씨좋은 치과의사가 된 탓에 빈부격차가 극심한 이집트에서 그녀는 많은 돈을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엘리트코스였다.


하지만 정작 나를 행복하게 했던  퇴근  봉사활동이었어


기본적인 의료지원을 받을  없는 빈민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그녀의 삶에 활력소였다. 어느 , 멀쩡한 교정기의 색깔을 바꾸고 싶다고 찾아온 ‘있는   교정기를 손봐주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거리의 아이들에 있는데,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 하느냐고. 그렇게 Abeer는 가지고 있던 모든  버리고 스웨덴으로 향했다. 그녀가 살던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지금 그녀는 공중보건 public health 공부하고 있다.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고, 세미나에 다니고, 아주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다.


교과서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하던 글로벌 리더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꿈을 가지고, 그것을 동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이윽고 세상을 바꿀  있는 힘을 가지게  사람들. 그들을 글로벌 리더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처음  사람을 포근하게 반기는 그녀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글로벌 리더  자체였다.      


수줍게 웃는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눈으로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북유럽이라는 환상으로. 스웨덴이 그토록 좋은 복지를 가진  지나치게 긴 밤이 가져온 뿌리 깊은 우울과 높은 자살률 때문이라는 어느 사회복지학과생의 목소리를 잊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어떤 형태의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네모난 책상과 , 반경 10cm 불과했던 나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자격이 있는  같았다. 나를 그저   내던져  것이다.  분홍색 상상의 그물망에 뭐라도 걸리겠지 하고선.     


세상을 바꾸려 스웨덴에 온 그녀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온 내가 미지근해져버린 과일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나는 누구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파란 이케아 가방에 꾹꾹 담긴 생활용품들과 냉장고에서 잠자던 된장 고추장까지 가득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내가 선택한  여정에 적응해보려 노력하지만  걸음보다 빠르게 어두워지는 하늘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숙사  이카 ICA(체인 대형마트)에서 싸구려 원두를 1kg 샀다. 뜨거운 물에 갈린 원두와 설탕을 넣고 휙휙 저어 만든 커피 한잔을 책상에 올려두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 하늘을 쳐다보면 아까의 하늘은 찾아볼 수가 없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 너머에 집중해본다. 노란 머리를 질끈 묶고 팔을 걷어붙인  아이는 춤을 추듯 한참을 이불을 턴다.  옆방의 남학생은 한참을 서서 잼인지 후추인지 모를 조그마한 병을 10분도 넘게 바라보고 있다. 알지 못하는 문자를 해독이라도 하는 걸까.    내려가는 소리, 노트북에서 나오는 작은 기계음. 지금은 그저, 맨발로 잔디를 걷는다는 이곳의 여름을 보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여름을 기다려보고 싶다. 오후 세시에 달이 뜨는 지금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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