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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26. 2020

사라진 열쇠의 행방


살다 보면 가끔씩 찾아오곤 하는 상쾌한 아침,

오늘이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떴을 , 고요한 공기가 포근했다. 추운 날씨에 맞지 않는 멋쟁이 외투를 꺼내 입었다. 머리를 곱슬곱슬 말리고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후줄근한 옷만 입다 차려입고 나왔으니,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느낌이 좋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민선이와 이케아 ikea로 향했다. 이케아 푸드코트에서 늘 그랬듯 베지 볼 vegie ball을 주문했는데, 오늘따라 매쉬포테이토를 많이 주신 덕분에 배를 빵빵하게 채웠다. 이케아 앞 버스정류장에서 1번 버스를 타고 가며 저녁에 만날 비웬 Biwen에 대해 이야기했다.


민선이는 교환학생 설명회에서 비웬을 처음 만났다. 비웬은 젠더 gender 대해 깊이 공부하기 위해 다니던 베이징 명문 대학을 자퇴한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민선이가 비웬을 처음 소개해 줬을 , 나는 그녀의 앳된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런 용감한 결정을 이렇게나 어린 나이에! 성교육에 식견이 깊은 그녀와 단둘이 저녁식사라니, 기대가  수밖에.


전혀 따듯해지지않는 멋쟁이 외투!


경제관에서 오후 수업이 끝나고 6번 버스를 타고 기숙사동으로 돌아왔다. 비웬은 나와 똑같이 플록스타 flogsta 6동에 살고 있었다. 7층 내 방에 올라가 무거운 전공책만 던져두고 그녀가 사는 4층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며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열쇠 체인이 느껴져야 했다. 무언가 허전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안 돼...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왔단 말이야.        


밤이면 밤마다 콧물이 줄줄 나 매일 챙겨 먹던 감기약도, 따뜻한 외투도, 노트북도 핸드폰 충전기도 모두 다 방에 두고 온 오늘,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열쇠를 잃어버렸다. 다급하게 기숙사 행정실 긴급번호로 전화를 했다. 한참을 기다려 연결된 전화에 과장되게 울먹이며 사정했다.


“제가 많이 아픈데 약이 없어요. 얇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옷도 없어요. 칫솔도 없어요. 제발 한 번만 와서 문 좀 열어주세요.”


수화기 뒤의 인물은 단호했다. 업무 외 시간에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가서 문을 여는데만 출장비 1300kr(우리 돈으로 약 17만 원), 열쇠를 새로 받는 건 2000kr(약 26만 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열쇠를 새로 받으면 출장비를 합쳐 3300kr(약 43만 원)!


이 나라가 원래 이렇게 단호했던가. 아니, 3센티짜리 열쇠 쪼가리를 잃어버린 게 그렇게나 큰 일이었나. 한 푼 두 푼 모은답시고 시리얼로 끼니를 때우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길에서 노숙을 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 출장비를 쓰지는 않으리라! 새 열쇠를 받는 돈으로도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출혈이니까.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가방을 세 번째 털어본 후 비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한데, 1층으로 내려와 줄래? 열쇠를 잃어버려서 들어갈 수가 없어.


후다닥 뛰어온 비웬을 데리고 열리지 않는 방문이 있는 7층에 올라가 코리도 복도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케아에서도 멀쩡히 있던 열쇠가 이곳에 있을 리 없었지만 ‘절대 열쇠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까지 샅샅이 뒤졌다. 나와 함께 한참 동안이나 주방을 뒤지던 비웬은 휴대폰 후레시를 켜고 얼이 다 빠져서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의자 쿠션을 떼어내 간이침대를 만들고 그녀의 코리도 공용 소파에 놓인 이불을 가져왔다. 예상치 못한 상대와 예상치 못한 동거가 시작됐다.



의자가


침대가 되는 마법!


비웬은 넉넉한 니트와 따뜻한 외투를 내어줬고,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엔 침대에 걸터앉아 남자와 여자, 한국과 중국,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시드니의 인종차별을 자주 이야기했는데, 그럴 때면 실망과 오기가 함께 느껴졌다. 하굣길에 인종차별적인 벽화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 곳에 사는 것은 매일매일이 도전이었을 것이다. 겉은 동양인인데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서양에 가깝다며 스스로를 banana라고 자조할 땐 눈물이 나왔다.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을 붙잡고 밤새 울고 웃었다.


비웬의 코리도에선 한국인 홈리스가 들어왔다고 난리법석이었다. 홍콩에서 온 키미 Kimmy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와 앞머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연예인이 너무 예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한국인인 것과, 한국 연예인이 예쁜 것과, 내게 앞머리를 부탁하는 것에는 조금의 연관성도 보이지 않았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중학교 시절 앞머리 다듬던 스킬을 되살려내려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다. 한국인에게 앞머리를 맡긴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키미는 그저 재밌어할 뿐이었다. 미용사 속도 모르고.


나는 첫 번째로 열쇠를 잃어버린 한국인 교환학생이 되었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네가 집을 잃었으니 함께 홈리스가 되어주겠다는 이들이 하나 둘 나를 찾아왔다. 같은 동 3층에 살고 있던 제혁 오빠네 코리도 공용 주방에 모여 밤새 술판이 벌어졌다. 주말엔 경찰서에 가서 5개월 치 분실 열쇠를 다 뒤지고 왔다. 웁살라 페이스북 게시판을 열쇠를 찾는 글로 도배하며 기대와 실망을 넘나들었다. 인생에서 제일 정신없고 따뜻하고 스릴 넘치는 2박 3일이 지나갔다.

      

최악의 순간엔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빈틈 속에서 나는 사람의 온정을 찾아냈다. 미처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좋은 친구를 발견했다. 눈앞에서 스쳐간 26만 원이 미치게 아까웠지만 까짓, 앞으로는 걸어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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