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10명의 학생과 함께 쓰는 주방이 익숙해질 무렵, 플록스타 6동 721호에 뒤늦은 주인이 들어왔다.
벨기에에서 날아온 벤 Ben. 30인치 캐리어와 기내용 캐리어도 모자라 배낭을 빵빵하게 채워 온 나와는 달리 그는 달랑 배낭 하나를 들고 왔다. 이사 들어올 때면 으레 생기기 마련인 자잘한 소음조차 없었다. 그날도 코리도 입구 옆에 있는 (주로 아무도 앉아있지 않는) 공용소파에 홀로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지 않았다면 새로운 코리도 이웃이 들어온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Hi, I’m Ben!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데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상 예쁜 미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벤은 끝내주는 요리사였다. 우리가 일주일에 두 번쯤 마주 앉아 기숙사 주방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사이가 된 건 그가 끝내주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비건인 그가 동물성 재료를 하나도 쓰지 않고서 자꾸만 한 솥 가득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바람에 한 입씩 얻어먹던 게 그렇게 되었다.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나도 덩달아 우유 대신 아몬드 우유를 사 먹고 고기 대신 채소 믹스를 사 왔다. 엄청나게 맛있고 놀랍도록 속이 편한 음식이 너무 좋았지만 벤과의 저녁식사를 그토록 사랑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벤은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곳에 도착한 그날처럼 평생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세계를 여행했다. 마실 수 있는 물을 찾기 위해 한 시간 반을 걸어야 한다는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가장 궂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모든 반팔 티셔츠를 몸에 끼워 넣고 양말까지 손에 낀 채로 덜덜 떨며 밤을 꼴딱 새운 날을 웃으며 이야기해줬다. 아프리카를 추억할 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국경을 넘나들고 수도 없이 길에 혼자 남겨진 이야기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침낭과 텐트에 몇 날 며칠을 의지하는 삶을 기쁘게 추억했다. ‘아, 이번 여름에도 길을 잃어야겠다.’면서.
그가 해준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부러움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복잡한 내게 그렇게나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을 보면 말이다.
벤이 물었다.
“앞으로 어디에 살고 싶어?”
“누구와 살고 싶어?”
언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왔던 것 같은데,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잘 모르겠어. 그냥 여기선 편하고 행복할 뿐이야.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만큼. 언젠가 이곳에서의 기억을 뒤로하고 어느 회사 사무실에 앉아 하염없이 시계만 바라볼 생각을 하면 끔찍한데, 나에겐 선택권이 많지 않아. 알잖아.”
“그냥 여기에 사는 방법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그건 네가 정하는 거니까.”
그건 내가 정하는 거니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대학은? 전공은?
무엇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던 걸까. 같은 교육과정을 밟아 온 주위 친구들이 으레 하는 선택을, 그 사고 과정을 따라 그저 하염없이 걸어온 것뿐일까. 보이지 않는 궤도라는 것이 정말 존재했던 걸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그냥, 그냥.
훌쩍 집을 떠나 스웨덴으로 날아온 그는 또다시 훌쩍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훨씬 오래 내 곁에 남을 것이었다. 지나치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해달라고 더 자주 졸라야겠다. 더 많은 질문을 담아가기 위해.
*[비건 Vegan]
엄격한 채식주의자. 육류 및 해산물은 물론이고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