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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25. 2020

봄, 조금만 천천히.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층에 사는 바람에 우리 코리도 주방에선 웁살라 풍경이 훤히 보였다. 허구한 날 펑펑 내리는 눈 때문에 낮에는 하얀색 - 밤에는 까만색이 전부였지만, 가끔 햇빛이 하얀 눈에 반사될 때는 온 동네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열렬히 봄을 기다렸다. 스웨덴의 겨울을 사랑하기엔 밤새 줄줄 흐르는 콧물이 너무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같은 층 712호에 사는 스코틀랜드 교환학생 에비 Abby는 공용 주방에서 매일같이 빵을 구웠다. 빵을 굽는다는 게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인지 내가 주방에 갈 때마다 그녀는 오븐을 여닫고 있었다. 나는 밀가루를 계량하는 에비 옆에 서서 뜨거운 물에 코코아 파우더를 풀며 버릇처럼 말했다.


“봄은 도대체 언제 온담? 눈은 대체 언제 그치냔 말이야”


그러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소나무가 초록색인 게 새삼 놀라웠다.


창문을 때리는 둔탁한 빗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이 아닌 비...! 아니나 다를까, 창문 밖 눈을 한껏 움켜쥐고 있던 하얀 소나무들이 초록빛을 되찾았다. 억울한 기분이었다. 봄을 기다렸지만, 겨울이 끝나길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이 도시를 가득 메운 소나무가 푸르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모처럼 코리도 주방이 시끌벅적했다. 드디어 눈이 녹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제각기의 감상을 나누려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한참 동안 창 밖을 들여다봤다.


“이제 좀 따듯해지려나”

“속지 마, 여긴 스웨덴이야. 또 언제 눈보라가 몰아칠지 몰라”

“이대로 따듯해지기만 했으면 좋겠다. 겨울은 지긋지긋해”

‘하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고 얇은 옷을 꺼내 입기 시작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한낮의 꿈처럼 다 흩어져 버릴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2호선 지옥철에 몸을 던지는 삶으로. 언제나 그랬다. 인생은 매일 만나던 사람을 가끔 만나는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럴 것이었다.


지나가버릴 시간들에 의미를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웨덴의 봄이 그렇게 예쁘다고들 한다. 결국은 오고 말 봄을 기다리며 이 겨울을 잘 보내줘야겠다. 이 또한 다시없을 겨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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