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넘어가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데, 아내가 두말짜리 분무기를 창고에서 꺼낸다. 분무기에 물 20리터를 부은 후 살충, 살균 효과가 좋다는 님(Neem) 오일, 수용성 인가리 비료를 적당 량 물에 녹인다. 그리고는 분무기를 들쳐 메고 꼼꼼히 꽃나무들에 뿌리기 시작한다.
분무기를 메고 장미에 영양을 주는 아내
대개 무거운 것을 들 때면 “여보~~”라고 크게 외치며 남편을 찾는 아내지만, 꽃나무에 영양을 줄 때는 예외다. 신조가 ‘대충대충 빠르게’인 남편에게 식물을 맡기기가 미덥지 않은가 보다. 어두운 데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영양을 주고 있는 아내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다. 정원 등을 켜 준다. 장미가시에 찔리고, 거미줄에 얼굴이 걸리기도 하지만 아내는 괘념치 않는다. 정원 일을 할 때 아내의 표정은 진지하다.
브런치에 옥상 테라스의 정원 글을 가끔 올리니 다들 내가 가꾸는 정원으로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우리 집 정원의 주인은 아내다. 나는 아내의 지시에 따라 옥상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고, 무거운 화분을 옮기고, 때로는 화분이나 플랜트 박스에 필요한 흙과 퇴비를 구해와 아내가 꽃이나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역할만 한다. 한 마디로 정원의 머슴이다.
아내가 처음부터 정원 일을 잘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살아서 나간 식물은 거의 없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 집에 온 식물마다 며칠 비실대더니 말라죽거나 시들해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녀석은 20년째 동행하고 있는 선인장뿐이다. 선인장은 관심을 주지 않고 방치하면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한다.
삽목장에는 아내가 꺾꽂이한 장미와 라벤더가 잘 크고 있다
햇빛과 바람이 있는 옥상에서는 어떤 식물이든지 잘 컸다. 이사 후 화원에서 사 온 마가렛, 데이지가 꽃을 피우고, 지인이 준 수국과 풍로초가 무럭무럭 자라자 아내는 숨겨진 소질을 발견한 모양이다. 본격적으로 식물 공부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빨강 줄 장미 화분 하나뿐이었는데, 어느덧 10여 종의 장미가 풍성한 장미 정원이 만들어졌다. 요즘은 화원에 가서 꽃나무를 사지 않는다. 씨를 뿌려 키우고, 꺾꽂이해서 국화나 꽃나무를 늘려간다. 화분 여기저기에서 자연 발아하는 화초를 캐서 심어 놓아도 잘 자란다.
부작용? 당연히 있다. 늘어나는 화분에 쉴 공간이 자꾸 줄어든다. 화분의 수가 늘어나고, 나무들의 덩치가 커지면서 테라스는 점점 비좁아져 간다. 늘 잘한다고 아내를 격려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끔 부아가 치밀어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아내와 내가 정원에서 다투는 거의 유일한 이유다.(아내도 내가 무엇을 만든다고 하면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여러 다툼을 거쳐 테라스 가장자리에 설치한 검은색 배수판까지만 화분을 두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러다 보니 화분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는 것이 아니고 초등학교 입학식처럼 볼품없이 일직선으로 들어선 모습이다. 정리정돈, 줄과 각을 중요시하는 나는 만족하는데 아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배수판에만 화분을 두기로 아내는 약속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는 것은 축복이다. 정원 배치를 상의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같이 즐기며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좋다. 갑작스러운 명예퇴직과 코로나 사태로 하루 종일 붙어 있는데도 서로가 지겹지 않다.(내 생각만 그런가?) 거기에 정원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아내와 함께 떼 지어 천변을 나는 백로의 우아한 비행을 감상하기도 하고, 불을 끄고 탁자에 누워 밤하늘에서 견우 별과 직녀 별을 찾기도 한다. 잊고 있던 작은 것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옥상 정원은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구입해 놓았던 시골 땅에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지난달 건설회사의 계약했다. 집이 완공되는내년 봄에는 이사를 해야 한다. 200평이 조금 넘는 땅이라 정원도 제법 넓게 가꿀 수 있을 것 같다. 후회할 수도 있는 결정인데, 지금이 아니면 나의 꿈인 귀촌을 영영 실행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내가 귀촌에 더 적극적이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남편과 다투지 않고 넓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싶은 마음이 큰 까닭이다.
시골에 잘 적응해서 내년에는 옥상 테라스가 아닌 귀촌 이야기를 브런치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