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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욱이 Apr 01. 2024

연인

21.4.1


연인


꼬불꼬불 이어진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는다. 들판을 지나고 골목길을 뚫고 마주한 파란 바다. 오예~ 환호도 잠시 다시 모퉁이로 방향을 튼다. 들판이다 얼굴에 영락없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다행이 내맘을 달래준 건 아스팔트도 시멘트 길도 아닌 푹신한 흙길. 사각진 세상, 딱딱한 인공 건물이 아닌 자연을 밟는다는 것에 축복을 받는다. 지쳐버린 마음을 어린시절로 데려간다. 흙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해롭지 않던 그때, 흙을 먹어도 안심되던 그때, 지금과 사뭇 다른 현실이지만 흙이란 자체가 그리웠고 반가웠다.


언덕 넘어 그 흔한 레드 카펫이 아닌 조각조각 엘로우 카펫이 깔렸다. 시상식으로 입장하는마냥 가슴의 두근거림이 몸으로 전해온다. 동쪽 당근의 고장이라 불릴만큼 제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구좌읍 한동리엔 지붕위엔 울긋불긋 때아닌 가을이 내렸다. 이보다 화려한 동네가 있을까. 까만 현무암 돌담과 노란 유채꽃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낸다. 노란 유채꽃의 달작지근하고 은은한 향기가 먼저 콧속을 파고든다. 텅 빈 가방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은근히 뱃속을 두드리며 약을 올린다. 삼동초라고도 불리는

 유채꽃은 봄나물 무침으로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바람과 유채꽃의 유혹에 입맛을 다져본다.

유난히 눈에 띄는 유채꽃과 달리 텅 빈 거리는 허전하다. 허전한 배도 꾸욱~ 꾹꾹 가방을 향해 참을 수없는 울음을 터트린다. 유채꽃이 승리로 끝을 맺는순간이다. 쓴 패배의 화를 못참고 길가 옆 돌멩이 하나 들어 던지고 싶을정도로 얄밉고 배고픔에 화가 더욱 치밀어오른다. 생각이 짧았다 출발하기 앞서 먹거리 준비가 부족했고 뻔히 보이던 편의점을 지나쳐 온 것이 오늘의 최대 실수다. 얼마 이동도 하지 않았지만 배고픔은 금새 모든 체력을 고갈시켰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닷가 앞 정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찔끔찔끔 뿜어되던 땀방울이 날라오던 바다 바람의 쓰리 펀치에 쏙 들어가고, 거울을 꺼내어 넉다운 된 내자신을 훑어본다. 피식 웃음만 터져 나온다. 된통 당한 머리 스타일은 제멋대로 뒤집히고 좌우로 쏠려 자리를 못잡은 듯 난리버꾸통이다. 바닷바람의 어퍼컷이 한방 제대로 꼿혔다.

몸과 다리는 지쳤지만 마음은 편하고 아늑하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돌담 넘어 조용한 집을 그냥 물그러미 쳐다 본다. 돌담 넘어 바라보이는 미닫이 문 하나. 문을 열고 누군가 나올 것 같은 심상치 않은 예감. 하르방, 할망만 아니면 된다. 어여쁜 아가씨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눈알이 빠져라 쳐다보지만 아무 변화없고 시간만 흐르고 눈물만 찔끔, 눈알만 빨게진다. TV에서 보이는 조선시대 담벼락 아래에는 아리따운 처자도 많더니만, 구좌읍 마을엔 어여쁜 아가씨의 존재는 귀했다.

타들어가는 속마음 따윈 아랑곳없이 파도는 밀려왔다 갔다를 반복할 뿐. 가슴을 시퍼렇게 후려친다. 벌써 여인을 만나 장난질이다. 속터지는 맘을 정자위에 남겨두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텅 빈 아픔을 누군가 구원해 주길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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