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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Oct 22. 2024

자기 할 말 다 하는 여자가 좋습니다

춘향의 딸들, 남원

"이 대리님, 소식 들었어요?"

출근하자마자 한 주임이 티션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 욕이 거기까지 퍼진 거면 대충 맞아요."

내가 구식 컴퓨터를 때려서 부팅하며 성의 없게 말했다.


"우리 회사, 지방으로 내려간대요."

"뭐라고요?!"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취업 사기 아니냐고요. 짜증나, 정말."

한 주임이 볼멘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어, 어디로 내려가는데요?"

"몰라요! 사장 고향 쪽 어디래요."

한 주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집살이도 아니고 내가 남의 고향에 왜 내려가냐고요."

"아니 이 개자식들이..."

"그런데 이 대리님은 왜 이 얘기를 처음 들어요?"

"저 왕따인 거 모르세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알지만 회사 이전하는 거, 김해경 과장님이 사업 담당이잖아요."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하니 섰다.


"그 얘기가 아니면 도대체 그동안 두 분이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하셨던 거예요?"

한 주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머리를 짚으며 옆 사무실로 갔다. 눈으로 레이저를 눈으로 쏘자 김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앞장서서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한 주임이 유리벽 너머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김해경을 벽에 세워두고 숨을 골랐다.


"드디어 해고당했나요?"

김해경이 아침 먹었냐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차라리 잘리는 게 낫죠!"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회사가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내려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김해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회사가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김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거야 제가 서울에 있어야 하니까 그렇죠!"

"이 대리가 서울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뭔데요?"

"......"

"남들이 다 서울에 있다고 해서 나도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 전 그 지방에 연고도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면 결혼은 또 어떻게 해요?"

"어차피 서울에서도 못 하는데 상관없지 않나요?"


가끔 정말 이 인간이 죽었으면 좋겠다.


"걱정 말아요. 이 난리를 쳐 결국 못 내려가니까."

김해경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 못 내려간다니요?"

"이 회사에는 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김해경이 느릿하게 말했다. "검토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릴 거예요. 설마 그때까지 이런 회사에 다닐 건 아니죠?"

"... 그럼 과장님은 회사 이전 사업 관련해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거예요?"

"나야 놀러 다니죠."

김해경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투로 말했다.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된 건가요?" 내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이따가 후보지로 출장이나 가죠." 김해경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저도요? 전 출장 가봤자 할 일이 없는데." 내가 우물거렸다.

"사무실에서도 할 일 없잖아요."

"... 저는 화분에 물도 준다고요! 나가면 뭐 다 사무실보다 좋아요?! 남쪽 지방이면 뭐 다 예쁘냐고요?!"


***


남원의 광한루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햇빛 사탕 같은 나뭇잎에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하늘은 도화지에 칠한 것처럼 푸르렀다. 숲에는 꽃들이 조명처럼 빛났고 호수에는 돛단배만 한 잉어들이 헤엄쳤다. 나무에는 원앙 수십 리가 열매처럼 앉아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나부끼는 밧줄 그네 옆으로 흰나비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갔다. 이몽룡이 그네 타는 춘향을 쫓아가고 나비는 그런 이몽룡을 쫓아갔다. 나비는 이몽룡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월매와, 그런 월매에게 반드시 장원급제를 해서 돌아오겠노라고 서를 쓰는 이몽룡을 빤히 내려다. 그리고는 옥에 갇힌 춘향이 찬 칼 위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암행어사 이몽룡이 출두하자 사뿐히 날아갔다.


우리는 비어있는 밧줄 그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과장님은 성춘향 씨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불쑥 물었다.

"똑똑한 사람이죠." 김해경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똑똑한 여자 좋아하세요?"

"똑똑한 여자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밥 먹으러 가죠."


***


그 유명한 원 추어탕은 시래기와 된장이 들어간 은은한 음식이었다. 아침 식사로 먹는 속 편한 된장국처럼 부드러웠다. 미꾸라지를 통으로 넣어 식감이 거칠고 산초와 고춧가루를 왕창 뿌리는 북쪽의 추어탕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딘가 심심한 것 같으면서도 구수했다. 함께 주문한 미꾸라지 튀김은 아주 바삭했고 카레향이 났다.


"아까 그 원앙은 어디선가 잡아와서 광한루에 풀어놓은 거겠죠?” 내가 추어탕을 훌훌 마시며 말했다.

"성춘향본부 가서 물어봐요." 김해경이 정장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성춘향본부도 있어요?" 내가 뚝배기에서 고개를 들었다.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기백 있는 여자는 뭐라도 건립해서 기려야죠." 


나는 추어탕을 수저로 뜨며 김해경을 흘끗 바라보았다.


"과장님, 저 사적인 질문 해도 됩니까?"

"아뇨."

"과장님 여자친구는 과장님이 이렇게까지 놀러 다녀도 괜찮대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자친구가 누군데요?"

"뭐 있다 치고요."

"자기 인생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은 다른 사람 인생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자친구가 밤늦게 술 먹고 연락 안 돼도 뭐라고 안 해요?"

"내가 뭐라고 합니까? 성인은 자신이 선택한 자유를 누리고 자기 행동에 온전하게 책임을 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예쁜데 방목형인 여자가 좋다고요?"

"나는 자기 할 말 다 하는 여자가 좋습니다."

김해경이 칼같이 말했다.

"... 그게 틀린 말일수도 있잖아요."

"내가 옳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김해경이 흔들림 없이 말했다.


나는 미꾸라지 튀김을 한입에 넣고 광한루를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평온을 오랫동안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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