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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Oct 29. 2024

책에 절여진 뇌 만들기

회사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대부분 가짜다

'총각, 전세 어떻게 할 생각이여? 더 살 거지?'


김해경의 집에 내 짐을 조금씩 채워놓고 있을 때였다. 집주인 아줌마의 말도 안 되는 전 받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침수된 반지하에서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아이고! 나도 총각이 나랑 사주가 안 맞아서 나갔음 좋겠어! 근디 내가 지금 돈이 묶여서 방법이 없잖여.'

"그럼 돈을 푸세." 내가 화가 나서 말했다.

'총각, 으른 말 들어! 내가 원래 이번에 보증금 올리려 했는데 총각 사정두 딱하고 해서 보증금 안 올리고 더 살게 해주려는 것잉께! 내가 이 얘기하니까 부동산에서 그럼 나만 손해 본다고, 요즘 누가 그렇게 세입자 좋게만 해주냐고 난리여. 집도 침수되고 총각 잘 데 없을까봐 내가 부모 같은 심정으로 그러는 것이여.'

"아줌마. 그 집이 침수됐는데 그 집에서 어떻게 자요. 그리고 아까는 돈이 묶여서 보증금 못 주는 거라면서요."

'그것은... 으른이 말하는데 왜 자꾸 토를 달어! 내가 총각보다 더 살았응께 내 말을 들어!'


나는 이 아줌마와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고, 전세 만기일에 보증금이 안 들어오면 등기 쳐서 경매 넘겨 버릴 테니까 똑바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 뒤 통장에 전세 보증금이 조용히 입금되었다.


그 무렵 파인애플을 써는 일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내 손목과 맞바꾼 야근 수당을 모은 돈이 드디어 세희에게 보낼 파혼 위약금에 거의 도달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여직원들에게 파 로 통했지만 파인애플에서 해방된다는 것, 그리고 빚에서 해방된다는 것에서 엄청난 희열자유를 느꼈다.


밤새 파인애플을 썰어 번 야근 수 돌려받은 전세 보증금의 일부를  세희에게 위약금 전액을 보냈다. 세희는 절반만 보내라고 했지만 우리의 결혼준비도 모두 세희가 한 데다가 중간중간 들어간 웨딩 추가금 같은 것을 세희가 조용히 부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세희의 결혼준비에 보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파혼한 돈으로 세희가 얼마 남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어지럽고 막막하다가 끝에 가서 한 번에 맞춰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모든 돈이 정리되었다. 한밤중에 세희에게 돈을 송금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몹시 피곤하지만 할 일을 다 끝낸 사람만이 잘 수 있는 밀도 있는 잠을 다.


아침에 일어나자 세희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나는 세희에게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이상 야근도 하지 않아도 되고 파인애플도 썰지 않아도 되고 빚도 없고 파혼까지 정리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해경의 집에서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났다. 네 시에 알람을 맞춰봤자 어차피 다시 잠들 것이므로 마음을 내려놓고 일곱 시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뜨거운 차를 탄 뒤, 세희를 만나기 전에 쓰다가 말았던 장편 소설을 다시 이어 쓰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정도 글을 쓴 뒤 샤워를 하고 출근을 했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고 싶어 음악 어플을 지워버렸다. 버스에오디오었으므로 적당히 흘려듣고 적당히 취하는 편안한 책을 골랐다. 데일 카네기가 괜찮았다.


회사에 출근해 9시부터 10시까지 업무를 하고, 10시부터 점심시간 전까지는 예전에 중간까지 읽고 덮었던 철학서를 가볍게 읽었다. 틈틈이 업무 전화를 받았지만 김해경의 말대로 내게는 '일'이 없었다. 내가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모두가 딴생각만 하는 회의 참석이나 뜬구름 잡는 무슨 전략 어쩌구 하는 보고서 작성이 전부였다. 나는 그런 가짜들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간단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마저 읽었다. 사람들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고 최 부장도 눈치를 줬지만, 나는 집도 없고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 누군가와 불필요하게 이어지며 가십과 수다로 나를 소모하기보다 나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삼십 분 정도 글을 썼다. 아침에 고치던 장편 소설은 김해경의 집에 있는 내 컴퓨터 안에 있었으므로 점심시간에는 핸드폰으로 짧은 토막글을 쓰거나 연재하는 글들을 정리했다.


오후에는 최 부장에게 앞으로 열 시에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최 부장이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이 대리, 파인애플을 계속 썰어서 정신을 안정시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최 부장이 걱정스럽게 외쳤다.

"저는 열 시에 출근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침에 집중이 잘 됩니다."


최 부장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집중하기 위해서 아침에 회사에 안 오고, "

"괜찮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부장님."


커피를 들고 들어온 김해경이 태연하게 말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김 과장은 자네 직원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최 부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뭐 그렇죠." 김해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능률 한번 올리시죠. 요즘 누가 고루하게 근무시간을 정해놓습니까."

"아아, 이 대리는 전혀 MZ 같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최 부장이 안타깝다는 듯이 소리쳤다.


퇴근하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낯설고 불확실한 도시로 갔다. 김해경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다. 어떤 주제를 대하고 어떤 사물을 보든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의 테두리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로 책상에 앉아 오래된 고전을 읽었고, 이불에 누워 내가 읽은 책들과 쓰고 싶은 책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고 자주 생각에 잠겼다. 나는 책에서 읽은 단어와 현상을 내 것처럼 가질 수 있었고,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뇌가 책에 절여진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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