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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Oct 15. 2024

멈추지 말고 그냥 쓰세요

아구를 먹으러 마산으로 간 건에 대하여

"혹시 어렸을 때 허영만 아저씨가 그린 <식객> 읽은 적 있어요?"


내가 다 읽은 슬램덩크 7권을 휙 던지며 말했다. 김해경은 거실 탁자에 앉아 이상한 언어로 쓰인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누운 채로 슬램덩크 8권을 집어 들었다.


"<타짜> 말고요?" 김해경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전 <식객>에서 본 음식들이 아직도 생각나요." 내가 옷소매로 슬램덩크 표지를 반질반질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무슨 음식인데요?"

"아귀찜이요." 내가 만화책 첫 장을 넘기며 흥얼거렸다.

"먹으러 가죠." 김해경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못 가요." 내가 대충 말했다.

"왜요?"

"다른 아귀찜은 안 돼요. 주인공이 마산에 가서 먹은 아귀찜이거든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과장님,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슬램덩크에서 누가 제일 좋은지 말하는 거 하죠. 하나..."


***


"... 하나 둘 셋 하고 아구를 먹으러 마산에 오자는 건 아니고요."


내가 아귀찜 거리를 걸으며 씩씩거렸다. 김해경은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얼굴로 골목의 아귀찜 식당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산은 벚꽃이 필 때 진해를 거쳐서 오는 게 좋긴 하죠."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벚꽃도 안 피었는데 왜 여기까지 냐고요."

"이 대리가 내 여자친구예요, 벚꽃 보려고 진해까지 게?"

"아귀찜 한 끼 먹으려고 마산까지 오는 건 말이 돼요, 그럼?!"

"한 끼 먹을 생각이에요? 그럼  말고 다른 걸 먹어야죠."

"왜 얘기가 그렇게 되죠?"

"이 대리, 아구불고기 먹어본 적 있어요?"

"... 아구로 불고기도 해요?"

"아구불고기로 맛을 내는 곳은 전국에서 그 집 밖에 없어요."


'그 집'은 번화가도 아귀찜 거리도 아닌 어느 작은 골목에 덩그러니 있는 식당으로, 평화식당이라는 오래된 간판을 건 곳이었다.


아구불고기를 한 입 먹자마자 김해경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마산까지 왔는데 아귀찜이 낫지 않나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서 먹어본 것 같으면서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달큰한 강정 같기도 하고 튀김 같기도 한 아구에 간장과 고추 양념을 맛깔나게 버무린 음식이었는데 양념으로 볶으면 비둘기도 맛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전투적으로 아구불고기를 먹어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로 겨우 배를 눌렀다. 김해경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대뜸 카페로 나오라고 불렀다.


"누군데요?" 내가 김해경에게 고갯짓을 했다.

"여기 어디 사는 사람이요."

"여기 산다고요?"

"마산에 그럼 아구만 사는 줄 알았어요?"


김해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 하나가 투덜거리며 카페로 들어왔다.


"암행어사냐? 어머, 안녕하세요." 툴툴거리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 기색으로 앉았다. "일행이 있는 줄 몰랐어요."

"네, 저도 제가 마산에 올 줄 몰랐습니다..." 내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여기는 책 사람입니다." 김해경이 나에게 간단하게 그 여자를 소개했다.


나는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갑자기 포만감과 느긋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낯선 각성이 찾아왔다.


"밖에 널린 게 책인데요." 여자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해경이 애인인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여기도 책 쓰는 사람이야." 김해경이 여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되시는 건가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책을 세 권 냈지만 아직 그러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니까요." 여자가 간단히 말했다.

"저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내가 얼른 말했다.

"벌어먹고 사는 일이 있어야죠. 해경이가 나를 어디서 만났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던가요?"


나는 어리둥절하게 김해경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판사예요. 살면서 나를 볼 일이 없어야 삶이 평온하죠. 그런데 김해경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정신없는 사람이 됐어요." 여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글을 언제 쓰세요? 쓸 시간이 나세요? 퇴근하고 쓰시는 건가요?" 내가 계속 물었다.

"퇴근하고는 시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많이 편찮으셔서요." 여자가 간단히 말했다. "오히려 쓸 시간이 없으면 효율이 올라가요. 이제는 이런 약속에 오면서도 써요. 일어나서 출근하기 전에도 쓰고,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쓰고, 지하철 안에서 쓰고, 잠들기 직전까지도 써요."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거대한 플라타너스 같은 벅참이 몰려왔다.


"오랜만에 이렇게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하고 대화해서 너무 좋아." 자가 김해경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김해경이 커피를 마셨다.

"저도 책을 내고 싶어요." 내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계속 쓰세요. 블로그든 브런치든."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당장의 결과를 바라지 마세요. 그저 멈추지 말고 그냥 쓰세요. 지금 대가 없이 쓰는 것들이 몇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불러올 거예요."



*커버이미지 : [네이버 지도]
평화식당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북로 16
https://naver.me/FEdsn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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