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정 Oct 01. 2024

결혼을 파토냈던 전 남자친구에게

준비된 순간이라는 건 오지 않더라

대만 잘 다녀왔어?


내가 가자고 했을 때는 여권 없다는 핑계까지 대면서 죽어도 안 가더니 회사 사람과는 참 쉽게 다녀오네.


오빠는 내가 일본에 가자고 졸랐다고 기억하더라. 아무리 고쳐줘도 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니까. 나 일본 가고 싶다고 한 적 없어, 대만 가서 망고빙수 먹고 싶다고 했었지. 생각해 보면 오빠는 늘 그런 식이었어.


난 요즘 주말마다 친구들 결혼식에 가. 남의 결혼식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낯익은 것들이야. 왜냐하면 내가 찾아보고 전화했던 예식장이고, 내가 고민했던 웨딩드레스고, 내가 생각해 두었던 신부 입장곡이거든.


오빠는 그걸 로망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런 단어로는 부족할 거야.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결혼식을 생각했었거든. 누구에게나 오랫동안 물을 주고 기른 소망이 있잖아.


어제는 내가 부케를 던져 주려 했던 친구가 결혼했어. 지은이 기억나지? 시댁에서 신축 아파트를 받고 천만 원짜리 샤넬백과 시그니엘 프러포즈를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오빠가 내게 꼭 그 친구의 SNS를 봐야 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그 지은이.


그런데 오빠, 사실 나는 괜찮았어. 지은이가 오빠 얼굴 몰래 훔쳐보는 거 알고 있었거든. 지은이도 자기 남자친구와 다르게 욕도 안 하고 여자를 때리지도 않는 오빠가 궁금했을 거야. 오빠 덕분에 나는 지은이 앞에서 가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예비 신부가 되곤 했어.


내 결혼이 파토나자 지은이는 무척 행복해졌어. 덕분에 지금 남자친구를 소개받을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파혼이 잘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남자친구는 내 요리가 맛없다고 하는 사람이야. 내 큰언니의 전화는 받지도 않는 사람이고, 자기 월급이며 통장이며 꼭꼭 감추는 사람이야. 수건을 개기는커녕 누워서 물을 떠 오라고 하는 사람이고, 남자가 화장실 청소를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과 12월에 결혼해. 오빠는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었지. 하지만 세상에 준비되는 순간이라는 건 오지 않더라.


나를 사랑했던 만큼 오빠 자신을 사랑해줘. 좋아하는 곳에 데려가 주고 맛있는 것도 먹여줘. 자유롭게 입히고 마음대로 생각하게 해 줘.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오늘 충분히 잘했다고 해 줘.


그러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계절이 올 거야. 


그때는 꼭 놓치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