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에는 정갈한 침대가 있었고, 침대 옆 콘솔에는 누군가 방금 만진 것 같은 향수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슬쩍 뿌려보자 김해경에게서 나는 향이 아니었다. 처음 맡아보는 중성적인 우드 향이었다.
거실 탁자에는 오래 찬 것 같은 손목시계가 풀어져 있었는데, 김해경의 시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냉장고에는 세희가 좋아하던 그릭 요거트인지 하는 희한한 음식이 들어있었고, 신발장에는 김해경이 절대 신을 것 같지 않은 굽 높은 단화가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해부학 서적이 꽂혀 있었고 서랍 안에는 청테이프와 시집이 들어있었다.
나는 청테이프가 든 서랍을 조용히 닫은 뒤, 안방과 다용도실 어디에도 시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잽싸게 샤워를 했다.
욕실에는 바디샤워 서너 개가 있었는데 비슷한 계열도 아니고 향과 제형들이 천차만별로 다른 것들이었다.나는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저 바디샤워를 각자의 취향대로 쓰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면 지금도 쓰고 있을지도.
이러다가 집 안에서 여자라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태연하게 김해경의 침대에 누워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샤워기 아래에서 눈을 감고 젖은 머리를 넘기다가 당장 갈아입을 속옷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속옷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없는데 팬티가 백 장이 있든 한 장이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머리를 대충 털고 냉장고에서 흰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서랍 안에 뜯지 않은 새 속옷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잽싸게 새 속옷을 뜯었다.
신나게 포장지를 벗기는데 속옷 뒤에 처박힌 물컹하고 흐물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그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천이 스타킹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꽥 소리를 지르며 스타킹을 집어던지고 황급히 안방에서 나왔다.
거실에 깔린 이불 위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여자들은 도대체 왜 저런 걸 벗어두고 간단 말인가? 진정하고 핸드폰으로부동산 어플을 누르려다 마른세수를 했다.
김해경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솔직히 잘 곳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당장 살 원룸이 없다고 뭐가 잘못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집을 구하려면 우선 반지하 전셋집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했다. 전세 계약은 내년까지고, 그전에 세입자를 구한다면 보증금을 먼저 돌려받을 수는 있겠지만 침수된 집에 당장 사람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세희에게 파혼한 위약금을 일부 송금했다고 문자를보냈다. 핸드폰을 던져놓고 잠이나 한숨 자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앉았다.
세희는 내게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이야기하려다가 갑자기 이제는 이 여자와 내가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할 힘도 없었고 무엇보다 김해경의 집에서 지낸다는 말을 세희가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옆 사무실 과장님의 집에서 잔다는 말은 내가 들어도 이상했다. 나는 별일 없이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세희는 잠깐 답장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일어나 우유를 마셨다. 세희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고,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마시던 우유를 내뿜을 뻔했다.
세희는 내게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분간 누구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세희는 왜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너와 헤어졌으니까...
나는 핸드폰을 쥐고 모로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세희는 다시는 답장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새들이 멀리서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집이 된 머리로 이불 위에 앉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해경은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고 다행히 바디샤워의 주인들도 누워있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확인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세수를 했다. 어제는 몰랐는데 면도기도 여러 개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걷다가 아무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막 들어오는 열차에 올라탔다. 그때 김해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입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내가 지나가고 있는 역을 확인하고 더듬거리며 말해주었다.
-오이도로 와요.
"... 어디요?"
-아침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 김밥천국도 아니고 오이도가 아침 먹으러 들르는 곳이에요?! 과장님 밤새 오이도에서 누구랑 있었어요? 진짜 유부녀는 아니죠?"
-오이도역에서 봅시다.
김해경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나는 두어 번의 환승 끝에 오이도역에서내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김해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음 지하철이 들어왔다. 사방팔방으로 김해경을 찾던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태연하게 열차에서 내렸고, 나는 김해경에게 이 아침에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해물 칼국수집은 포장마차 같은 오래된 노포였다. 우리는 밖에 있는 파란 플라스틱 탁자에 앉았다. 나는 의자 다리를 돌멩이 틈에 단단하게 고정하고 바닷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인 남자가 익숙하게 물컵을 들고 나왔다.
"오늘은 예쁜 총각이랑 왔네." 주인 남자가 칼국수가 담긴 양푼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김해경과 주인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누구랑 오는데요?" 내가 주인 남자에게 재빨리 물었다.
"나는 치정에는 안 끼는디." 주인 남자는 무미건조하게 말하고는 물통을 내려놓고 가 버렸다.
"진짜 유부녀예요?" 내가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그런 쓸데없는 소문은 자꾸 어디서 들어요?" 김해경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얼굴로 말했다.
"다들 과장님이 이 집 저 집 파탄내고 다니는 줄 알아요!"
"파탄은 이 대리 반지하가 그렇게 된 게 파탄이에요. 칼국수나 먹어요."
나는 김해경을 노려보다가 해물 칼국수를 건졌다. 노포 밖에는 비가 조금씩 떨어졌다. 펄펄 끓는 칼국수는 바지락, 애호박, 감자, 양파 같은 것들이 들어가 뜨끈하고 쫄깃한 감칠맛이 났다.
우리는 해물 칼국수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주인 남자는 무심하게 믹스 커피를 놓고 갔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비와 바람이 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집에 갑니까?" 내가 바다를 보며 물었다.
"비 내리는 잠수교에 서 있어 본 적 있어요?" 김해경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절대 없죠. 과장님은 설마 있어요?"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김해경은 말이 없었다. 나는 김해경을 바라보았다. 김해경은 여전히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나는 파도가 부서지는 방파제를 멀리 내다보다가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기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