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경이 퇴근 후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주로 저녁 약속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친구도 애인도 없는 내가 선약이 있을 리 없었다.
약속이 없다고 대답하면 열받게도 갑자기 '수원?' 같은 톡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저녁을 먹으러 수원에 가자는제안이라는것을뒤이어'평택?'이라는 톡이 오고 나서야알게 되었다. 이제는화조차나지 않았다. 너무 황당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다시 연락이 왔다.
[세종?]
아니 왜 더 밑으로 내려가냐고.
김해경은 서울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겠다는 계획을 열차를 타기 십 분 전에 세우는 인간이었다. 출발하기 직전의 KTX에 갑자기 올라탄 것도 여러 번이었다. 심지어는 일부러 방향을 보지 않고 기차에 타서 아무 역에나 내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어느 도시에서 저녁을 먹을지를 가을 아침에 바람 불듯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남들은 휴가를 받아 마음먹고 가는 바닷가를 평일 낮에도 아무 때나 다녀왔고, 여행에서나 갈 것 같은 유적지를 퇴근하고 쉽게 방문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날은 회사의 창립기념일로 우리 회사만 우겨대는 공휴일이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쉴 수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오랜만에 (김해경의) 집에 누워 새 자취방이나 알아보면 딱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 사무실에서 죽은 화분에 마구 물을 때려 붓고 있는데 김해경이 다가왔다.
"퇴근하고 바로 나와요."김해경이 낮게 말했다.
내 옆자리의 한 주임이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진심으로 사무실에서 아는 척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목소리를 낮춰 잇새로 말했다. "그리고 저번에 수원가서 그 번쩍거리는 성곽이란 성곽은 다 돌았잖아요."
"이 대리 달리기 잘하면 늦게 나와도 상관없어요."
"... 달리기를 왜 해요?"
"인천공항이 넓지 않겠어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 인천공항에 왜 가는데요?"
"이 대리 가방에 여권 있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내가 여권 번호 물어봤잖아요."
"죄송한데 여권은 제가 집이 침수되어서 들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부랑자라서 그런 거지 퇴근하고 인천공항에서 번개 하려고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요."
"늦지 말고 나와요. 비행기 놓치면 자괴감 들어요. 지금 그 인생에서 자괴감까지 들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혹시 제가 지금 비행기 타고 어디를 가나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쉬는 날이 하루 생기면 타이베이로 가야죠." 김해경이 뭘 물어보냐는 듯이 말했다.
고백하자면 그것이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세희와 파혼하지 않았다면 세희와의 여행이 첫 번째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통탄할 노릇이었다. 스물몇 해를 여권 없이 살아오다가 세희가 일본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부랴부랴 만들어 두었던 여권이 이렇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희와 일본에 가는 것도 한 달 전부터 일정을 짰는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대만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첫 번째 해외여행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 비행기 처음 타요." 내가 우두커니 중얼거렸다.
"축하합니다. 답답하다고 창문만 열지 말아요." 김해경이 간단하게 말했다.
"저는 왜 과장님이랑 이런 걸 처음해야 해요?"
"이 대리."
"왜요." 내가 투덜거렸다.
"곧 누군가가 자기 인생의 모든 처음을 이 대리와 하게 될 겁니다. 그때 잘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이 대리가 먼저 모든 처음을 맞고 있다고 생각해 둬요." 김해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김해경이 내어 준 창가 자리에 앉아 깊은 어둠 속에 잠기는 한반도를 한참이고 내려다보았다.
언젠가는 이 사람과의 인연도 끊어지겠지.
한 번도 알고 지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저녁으로 아종면선의 곱창국수를 한 그릇씩 때려 넣고 곧바로 야시장으로 향했다. 답답한 정장을 벗어버리기 위해 편한 옷부터 샀다.
뜨겁고 파삭한 지파이를 입에 물고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KFC 치킨 시즈닝 같기도 하고 핫후라이드 같기도 한 짭짤하고 매콤한 맛 때문에 계속 입이 당겼다.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얼굴만 한 지파이를 들고 걷는데 갑자기 코를 찌르는 충격적인 냄새가 났다. 김해경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게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취두부는 타이베이의 어디에나 있었다. 나중에는 취두부 냄새가 나면 기계적으로 코를 막았다가 다른 길로 들면 태연하게 숨을 쉬었다.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잊힐 것 같지도 않은 냄새였다.
지파이가 너무 바삭해서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대만에 대해 벼락치기를 하려 했지만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나무위키를 몇 줄 읽다가 곯아떨어져버렸다.
다음 날, 김해경이 깨우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대만 사람들 사이에 껴 노상에서허겁지겁 아침 식사를 했다.
어젯밤에 읽다가 잠든 나무위키에 나와 있던 것처럼 대만은아침 식사를 먹는 문화가 보편적인 것 같았다. 우리는 달걀과 치즈를 넣은 딴삥과 무떡을 먹었는데 이 무떡이라는 것이 밍밍하면서도 쫄깃해 기가 막혔다.
점심으로 길고 긴 웨이팅을 뚫고 돼지고기 덮밥 같은 루러우판과 달달한 두부간장조림과 쫀득한 굴전을 먹을때였다.
"이 대만식 굴전, 결혼식 뷔페에 있지 않아요?" 내가 굴전을 열심히 뜯어먹으며 물었다.
"애슐리에나 있겠죠. 그래서 내가 이 대리한테 어중간한 곳에서 결혼하느니 하객들 애슐리로 데려가서 밥 먹이라고 했잖습니까."
"과장님은 애슐리에서 결혼 안 했잖아요!"
"내가 결혼했는지 이 대리가 어떻게 알아요?"
"과장님 집에 누가 스타킹 벗고 간 거 다 봤어요!"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스타킹은 와이프만 신어요?"
"... 과장님 그럼 그 스타킹 누군지도 몰라요? 미친 거 아니에요?!"
"접시나 그만 뜯어먹어요. 숨 돌리고 저녁 먹어야 돼요."
"뭘 또 먹어요? 전 여기서 더 못 먹어요." 내가 굴전을 뜯으며 항의했다.
놀랍게도 더 먹을 수 있었다. 홍탕과 백탕이 나뉘어 끓는 훠궈 옆으로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샤부샤부 재료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백탕에 새우 페이스트리며 꽃게며가리비며 대왕 오징어 같은 것을 잔뜩 넣어 먹었다.
배가 터질 때까지 훠궈를 먹고 정신력으로 망고 빙수까지 먹으러 갔다.냉동 망고를 통째로 갈아낸 망고 얼음 위에 연유와 생망고와 하겐다즈를 들이부은 어마어마한 망고 빙수였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까워서 숙소에서 눈을 부릅떴지만 배가 너무 불러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아침에일어나자마자 김해경과 밀크티를하나씩 물고 예류 지질공원으로 갔다.희한하고 독특하게 융기하거나 침식한 지면을 한참 동안 걸었다.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이 가득했고 그들 사이에서 나도 즐겁고 근심 없는 관광객1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여기저기를 걷다가 노상에서 소시지를 사 먹었다.불향을 입힌 따끈한 소시지는 돼지고기가가득 차 있고 사이사이에 쫄깃한 밥이 들어있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저녁에는 야경을 보기 위해 지우펀 마을로 가서홍등 아래를 돌아다녔다. 센과 치히로가 있던 마을에서처럼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상점에 들어가달달한 크림이 들어간 크래커를 잔뜩 샀다.
망고 젤리를 까먹으며 간 장제스의 관저는엄청났다. 집에 정원이 아니라 공원이 딸려 있었다. 사방에 이국적인 나무와 꽃과 새가 가득했다.
나와 김해경은 다리가 빨간 새를 구경하며 벤치에 앉아 남은 젤리를 먹어치웠다.충격적이게도 매실 맛이 있었다.
"과장님."
무화과 맛 젤리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김해경을 불렀다.
매실 맛때문에 김해경은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젤리를 고르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이 대리는 어떤 것 같은데요?" 김해경이 발효된 포도 맛 젤리를 살펴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어디 둥둥 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재미있어요. 그런데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무서워요. 나만 낙오되는 것 같아서 초조하고요, 가끔은 화도 나요."
"이 대리, 자기 자신과 별로 안 친하죠?"
나는 고개를 돌려 김해경을 바라보았다.
"본인에게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줘요."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잘해주세요. 이 대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