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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Sep 03. 2024

반지하 침수가 내 사주에 물이 부족해서라고?

지독했던 8월이었다

"이 대리 요즘 파인애플 왜 안 자릅니까?"


미친놈인 줄 알았다.


나는 김해경을 무시하며 죽은 화분에 마저 물을 부었다.


"죄송한데 돈 없어서 야근했던 거거든요."

"지금도 돈 없잖아요."

"과장님이 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하시면 안 될까요?"


나는 김해경을 자꾸만 흘끗는 한 주임의 시선을 피하며 새로 소리죽여 말했다.


"아직 전 여자친구한테서 연락 안 왔습니까?"


는 생수병을 탈탈 털다가 열이 뻗쳐서 김해경을 돌아보았다.


"누구 놀려요?"

"곧 연락올 겁니다. 파인애플 자르는  그만두지 말아요, 필요하니까."


순간 정말로 심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 주임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잽싸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김해경 역시 태연하게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대리님, 왜 김 과장님이랑 얘기해요?" 빠르게 따라 들어온 한 주임이 속사포처럼 물었다.

"... 도대체 이 질문은 뭐죠?"

"과장님이 왜 이 대리님한테 말을 걸어요?" 한 주임이 성급하게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쓸데없는 말만 거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김 과장님 돌싱 맞대요? 서류는 깨끗하다던데?"


서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는데 최 부장이 못마땅하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잽싸게 모니터에 얼굴을 박았다. 나는 엑셀을 번갈아보며 심각한 얼굴로 이면지에 강아지를 그렸다. 그리고 내 낙서는 늘 그렇듯 어느 순간 세희로 귀결되었다.


설마 세희가 다시 만나자 연락할까.


***


나는 더러운 반지하 자취방에 누워 세희가 다시 만나자고 할 경우에 변하게 될 내 인생에 대해 각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변기의 곰팡이를 락스로 지우기 시작했다. 이불을 세탁기에 처넣고 좁은 원룸 바닥을 물티슈로 닦았다. 끈적해진 멀티탭과 밥상, 냉장고 손잡이도 박박 문질렀다.


세희가 없어 먼지를 뒤집어쓴 나무 도마와 뒤집개와 접시 같은 것들도 개수대로 전부 꺼내 설거지를 했다. 냉동실 안에 처박아두었던 바나나 껍질과 언제 시켰는지 모를 남은 피자도 모조리 내다 버렸다.


문득 다시 글을 쓸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다시 세희를 피해 내 동굴로 들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예전에 썼던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디까지 썼는지도 모를 SF 소설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


등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모든 것이 빠르고 가벼웠다. 날밤을 새도 떠오르지 않던 장면끝까지 생각나지 않던 대사가 거침없이 풀려 나갔다. 이런 희열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언제였던가. 소설 속의 모두가 자신의 원칙을 현명하게 고수했고, 갈등은 부지런하게 복선을 회수하며 치달았다.


갑자기 세희와 연애하면서 겪었던 고뇌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꼈다. 불처럼 생생했던 고통은 미지근하게 망각되었고, 입체적이었던 통증은 몽롱하게 흐릿해졌다.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여자를 만난다면 이번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


세희는 파혼한 위약금의 절반을 부담하라고 말했다. 

김해경의 말이 정확했다. 파인애플을 계속 잘라야 했다.


***


메뉴개발팀 여사님들은 내 복귀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방 바닥을 개구리처럼 뛰어다녔다. 그리고 다결혼은 했냐고 물어왔다. 결혼을 세 번 했다가 돌아와도 결혼 또 안 하냐고 물을 판이었다. 


결혼을 세 달 앞두고 차였다고 말하자마자 나는 메뉴개발팀의 대스타가 되었다. 여사님들은 갑자기 나에게 진미채나 어묵볶음 같은 것을 싸주고 싶어 안달을 냈고, 나는 진땀을 흘리며 진미채를 거절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파인애플 안 자르죠?" 


나는 김해경이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 받아 들었다. 김해경은 거의 마다 나에게 커피를 조달하고 있었다. 파인애플을 써느라 너무나 지쳐버린 나는 최소한의 겸양이나 예의를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커피를 받아마시는 중이었다.


나도 나중에 과장을 달면 이렇게 대리들한테 주야장천 커피를 원조하게 되는 것인가. 이런 쓰레기 같은 회사에서 결재권자가 된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죽도록 우울해졌다.


"이 대리, 오리탕 먹어요?"

"... 오리탕이라는 음식이 있어요?" 내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김해경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녁에 군자역에서 봅시다. 일찍 퇴근하면 미리 가 있어요."

"왜요?"

"줄 서야죠." 일본이 섬이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 같은 얼굴로 김해경이 말했다.


***


'영미오리탕'의 영미는 돈을 청소기로 빨아들 것이다.

 

나는 배가 터지기 직전에야 오리탕 그릇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 고소한 들깨오리탕을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세상에 아직도 이걸 안 먹어본 사람이 있겠죠?" 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더 시켜요?"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더 먹으면 오리탕이 목으로 나올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살게요." 내가 벗어놓은 정장 재킷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계산했어요." 김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왜요?!"

"이거 사려면 이 대리 숨도 안 쉬고 파인애플 네 시간 썰어야 돼요." 김해경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 썰면 되잖아요!" 내가 발끈했다.

"위약금 다 갚으면 요." 김해경이 남은 오리탕을 훌훌 먹으며 말했다.


오리탕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금쪽이처럼 신나게 장를 쏟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산이 없던 우리는 아무 카페로 뛰어 어갔다. 잠깐 뛰는 와중에도 머리며 정장이 모조리 젖고 말았다. 


나와 김해경은 쫄딱 젖은 생쥐꼴로 뜨거운 피를 마시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어처구니없게도 지하철이 끊기고 말았다.


짱을 끼고 있던 카페 주인은 마감 시간이 지났다며 매정하게 우리를 내쫓았다. 마르기 시작했던 머리카락은 물에 빠진 시금치처럼 다시 푹 젖어버렸다. 나와 김해경은 급한 대로 건물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진짜 열받네요." 내가 머리를 털며 투덜거렸다.

"이 비에는 택시 못 잡아요." 김해경이 처마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가 어찌나 쏟아지는지 김해경의 목소리가 제대로 리도 않았다.


"그럼 어떡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첫 차 기다려야죠."

"... 저는 왜 자꾸 과장님이랑 밤을 새야 돼요?"

"이 대리 여자랑 밤샐 나이 지나지 않았어요?"

"자기소개하시는 거죠?"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기 모퉁이 돌면 보이는 저 술집입니다. 알아서 뛰어 오세요."


김해경이 먼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정장 재킷을 벗어 머리를 덮고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술집은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다. 나와 김해경은 가장 안쪽에 있는 좌석으로 들어갔다.


뜨겁고 맵칼한 어묵탕과 소주가 나왔고, 나는 술집의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서울에 마지막 장마가 오는 모양입니다." 


김해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대답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는 김해경의 말을 모래처럼 려들으며 심해 같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첫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며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다행히 비가 그쳐 있었다. 대신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거대한 쓰레기가 자취방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진흙이 묻은 더러운 밥상과 나무 도마 같은 것이 다세대 빌라 밖으로 모조리 꺼내져 있었다. 나는 누가 버린 것인지 모를 쓰레기들을 서둘러 지나쳐 내 반지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흙으로 뒤덮여 형체가 없어진 이곳이 내 '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장화 차림으로 어기적거리며 내 화장실에서 나오는 집주인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어쩐지 총각이랑 나랑 사주가 안 맞는다 했는디!" 집주인 아줌마가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외쳤다.

"... 사주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내가 원래 세입자들 사주를 다 확인하는디, 무슨 놈의 귀신이 씌었는지 총각 사주만 늦게 봐서 이렇게 되어 분 것 아니여!"

"... 그러니까 이게 지금 사주 때문이라고요?" 

"총각 사주에 물이 부족하다잖여!" 아줌마가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내 사주로 인해 침수되었다는 반지하 자취방 현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밖에 버려진 세희의 나무 도마가 떠올랐다.


"일단 총각이 청소부터 한 담에, "

"며칠 전에 청소했어요." 진흙탕이 된 화장실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럼 우째? 길에서 잘껴?" 아줌마가 핀잔을 주었다.


나는 갑자기 어체념 같은 것을 느꼈다. 소유했모든 것들의 거대한 상실이 정화작용처럼 나를 쓸고 갔다. 지난했던 모든 이 사라지고 내 안에 정적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주인 아줌마에게서 등을 돌리고 반지하에서 걸어 나와 끗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독했던 8월이었다.


나는 도로 연석에 걸터앉아 지나다니는 차들과 아직 집이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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