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못 했던 외박이었다. 심지어 어디 종로도 아니고 정동진 길바닥에서의 노숙이었다. 밤바다에 정신이 혼미해져 돌아가는 기차표를 충동적으로 취소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쓰러져가는 바닷가 여인숙은 문이 잠기지도 않는 데다 방 안에는 모래가 밟혀 사실상 개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진맥진해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방에 기어들어오자 어느새 일요일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데자뷔에 분통이 터졌다. 더러운 자취방에 대충 누울 자리만 만들고 나니 어디에 처박힌 건지 베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졌고, 입고 있던 셔츠를 마구잡이로 벗어 베개처럼 구긴 뒤 바닥에 누워버렸다.
도대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원래대로였다면 세희와 남들 같은 결혼식을 준비하고, 주말마다 이케아로 가구를 보러 다니고, 깨끗한 이불에 앉아 세희가 던져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먹고, 무엇보다 집에 베개도 있었을 텐데...
나는 곰팡이가 핀 천장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갑자기 비정상적일 정도로 급작스럽고 강렬한 욕구가 올라왔다.
써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은 채로 주말이 지나갔다.
***
하필이면 월요일부터 구청 공무원들과 짧은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까지 눈을 뜬 채로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구청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 죽치고 앉아 회의에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옆 사무실의 강 대리를 기다렸다.
회의 자료를 설렁설렁 끄적이면서도 어제 풀지 못한 그것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또 무엇을 쓰려하는가. 왜 이렇게 많은 시작을 반복하는가...
강 대리가 멀리서 걸어오는 실루엣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 종이의 여백에는 '회사', '시간', '아깝다' 어쩌고 하는 통탄할 낙서가 죽죽 그어져 있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커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커피를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키며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김해경은 내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았다.
".... 과장님이 왜 여기 있어요?"
"강 대리 코로나래요." 김해경이 자기가 입을 대고 마신 내 커피잔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벌써 강 대리 만난 거 아니죠?"
"과장님은 일이 없어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버럭 따졌다.
"내가 이 대리한테 묻고 싶은 얘기예요. 여기서 뭐 합니까?"
"회의하러 왔잖아요!"
"아무 내용 없는 회의던데요." 김해경이 가차 없이 말했다.
... 똑똑한데?
"... 지금 저한테 일이 없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내가 애써 발끈했다.
"있어요?"
"... 구청 공무원들이 자꾸 무슨 근거가 필요하다고 회의해야 한다는데 어떡해요. 저라고 여기서 바보놀이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내가 투덜거렸다.
"회의 몇 시에 시작합니까?"
"오후 두 시요."
"오전 열 시로 바꿔요." 김해경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금 어떻게 바꿔요?!"
"아무 내용이 없는데 왜 못 바꿔요?"
"... 왜 열 시여야 하는데요?"
"이 대리 혹시 시간 낭비하는 거 좋아합니까? 그런 취향이면 두 시에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 의견을 피력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구청에 전화를 걸어 한 시간 뒤로 회의를 앞당길 수 있냐고 묻자 '이 새끼 뭐지?' 하는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김해경이 내 커피를 마시며 자기를 팔라는 눈빛을 던졌다. 나는 잽싸게 과장이 지시했다고 죽는소리를 했고, 마지못해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구청에서 나온 공무원들은 앉자마자 시간부터 확인했다. 나는 오전에 회의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내 말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오직 회의가 길어져 피 같은 점심시간이 침해당할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내가 본 적이 없는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손해를 볼 수 없게 만들어진 인간들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들이 낙하산이 아니라 공채를 뚫고 입사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후 두 시부터 기약 없이 늘어질 예정이었던 회의는 오전 열 시에 시작해 정확히 열한 시에 끝났다. 구청 공무원들은 허겁지겁 순댓국집으로 달려갔고 나는 황망하게 서 있었다.
"우린 이제 복귀하나요?" 내가 멍하니 물었다.
"이 대리는 복귀해요. 난 점심 먹고 퇴근하겠습니다."
"아니 과장님! 제가 어떻게 과장님 혼자 식사를 하게 둬요?" 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대리, 귀 울려요."
"중국집 갈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근처에 잘하는 집 아세요?" 내가 잽싸게 말했다.
"거리가 좀 있을 텐데."
"일찍 끝났는데 뭐 어때요."
내가 얼른 말하자 김해경은 말없이 앞장을 섰다. 오랜만의 짜장면에 신이 나서 동네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는데, 김해경이 갑자기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과장님? 어디 가세요?"
"군산이요."
***
"이 대리 무궁화호 타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미친놈이에요?"
무궁화호는 KTX와는 다르게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차창에 머리를 대고 군산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짜장면 먹으러 왜 군산까지 가냐고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점심 먹기 좋은 동네예요." 김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과장님 동네에 중국집 없어요? 과장님 뭐 월북했어요?"
무궁화호는 쉴 새 없이 탈탈거렸고 내 분노도 함께 탈탈거렸다. 이내 못 견디게 배가 고파졌다. 뭐라도 먹고 화를 내야 했다. 군산역에서 내리자마자 중국집으로 향했다. 김해경과 한참을 옥신각신하며 걷다가 고개를 들자 눈을 의심할 광경이 펼쳐졌다. 길게 선 대기줄이 중국집 건물을 휘감고 골목 두 개에 걸쳐 늘어져 있었다.
"여기는 또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외쳤다.
"또 오겠다고 하지나 말아요." 김해경이 행렬의 맨 끝에 서며 팔짱을 꼈다.
"또 와도 과장님이랑은 안 와요." 내가 쏘아붙였다.
"올 사람은 있습니까?" 김해경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왜 없어요?" 내가 발끈했다.
"이 대리 파혼했잖아요." 김해경이 반듯하게 말했다.
왜 또 크게 말하냐, 개 같은 거...
줄을 서며 동태를 살펴보니 이 집의 대표 메뉴는 고추짜장인 것 같았다. 우리 앞에는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가방에 인형을 주렁주렁 단 여고생 네 명이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은 고추짜장밥 세 개, 고추짬뽕밥 두 개, 고추짜장 두 개, 고추짬뽕 한 개를 주문하자고 모의하고 있었다.
"우리 앞에서 끊기면 어떡해요? 우리 이거 먹으러 군산까지 왔는데?" 내가 다급하게 속닥거렸다.
"여기 줄 선 사람들 다 이거 먹으러 군산까지 온 사람들이에요." 김해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린 평일에 점심 먹으러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왔잖아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 걱정되면 저 친구들한테 고추짜장 두 개 남겨달라고 하죠. 저기서 밥을 여덟 그릇 먹는다는 것 같은데." 김해경이 앞에 선 여고생들을 가리켰다.
"작게 좀 말하라고요..."
"내가 가서 얘기합니까?"
"얘기하시고요, 전 죽을 때까지 과장님 모른 척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다. 갑자기 매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기어 나오는 것을 보니 너무 매워서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나와 김해경은 고추짜장 두 개를 주문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주 앉아 단호하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곧바로 음식이 나왔다.
별 기대 없이 짜장면을 입에 넣은 나는 빠르게 김해경의 말에 수긍했다. 오로지 이 음식만을 위해 다음 군산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옆에 앉은 여고생들은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저러기 위해서 앞머리를 돌돌 만 것 같았다.
잠시 뒤 매운맛이 어퍼컷처럼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고개를 가누기도 힘들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앞에 앉은 김해경은 이미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린 상태였다. 나는 통증처럼 조여 오는 넥타이를 풀고 의자에 뒤로 기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역시 젖은 목 뒤를 누르던 김해경이 포기할 거냐는 눈빛을 던졌다. 나는 더 젊은 내가 설마 지겠냐고 역시 친절하게 눈빛으로 말해주고 다시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잠시 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헐떡거리며 중국집을 기어 나왔다. 우리보다 정확히 두 배를 먹은 여고생들이 우리를 흘끗거리며 귓속말을 했다. 나와 김해경은 정장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패잔병처럼 인도 연석에 주저앉았다. 정장 구두며 넥타이며 모조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우리는 여전히 헤어롤을 풀지 않은 여고생들이 깔깔대며 우리를 비웃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일어나 이성당에 들러 단팥빵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
군산은 모든 곳을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였다. 마치 태초마을에서 포켓몬을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았다. 조금만 걸으면 박물관이 줄줄이 나오고, 더 걸으면 역사관이 무더기로 나왔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건축물도 여기저기 보존되어 있었다.
나와 김해경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신흥동 말랭이마을에 도착했다. 작고 낮은 집들이 빵빠레 아이스크림처럼 사부작거리며 층층이 올라가는 귀여운 마을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먹고 자고 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글만 쓸 수 있다면. 나는 말랭이마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이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서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뚝뚝 떨어졌다.
"저도 여기서 글만 쓰고 싶어요." 내가 중얼거렸다.
"무슨 글이요?" 김해경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모르겠어요. 이제 뭘 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갑자기 치밀었다가 갑자기 힘이 빠지고 갑자기 조급해졌다가 갑자기 답답해져요. 어제부터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갱년기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김해경이 말했다.
"뭔데요?" 내가 급하게 물었다.
"파혼한 애인한테 할 만큼 다 했나요?" 김해경이 물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열심히 해야 후회가 없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에 불성실했던 자들은 소강상태에 이를 때까지 감정의 벼락치기를 해야 합니다. 이미 상대가 끝낸 사랑에 뒤늦게 매달려야 하죠. 방학 숙제 같은 겁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요?" 나도 모르게 절박하게 물었다.
"방학은 언젠가 끝나지 않겠습니까?"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어느새 달이 희미하게 떴다. 나와 김해경은 투닥거리며 월명공원을 걸었다.
"그러니까 내가 세희한테 제대로 못해서 뒤늦게 뭔가를 하고 싶어졌다 이거예요?" 내가 따졌다.
"지금 본인이 묻고 본인이 대답하고 있는 거 알고 있죠?" 김해경이 가차 없이 말했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전 남친이 연락하는 거라면서요."
"이 대리 같으면 좋겠습니까?" 김해경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쓰고 싶은 무언가의 경계가 사진처럼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희에게 내 마음이 어떤지 써서 주면 세희가 더 싫어한다는 얘기잖아요." 내가 따져 물었다.
"보내지 않으면 싫어하지도 않겠죠." 김해경이 거침없이 말했다.
"... 쓰고 나서 보내지 말라고요? 언제까지요?"
"먼저 연락 올 때까지요."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 연락 안 와요." 내가 힘없이 말했다.
"파혼한 거 아닙니까?"
"알면서 왜 자꾸 물어봐요?" 내가 씩씩거렸다.
"써 놓고 기다려요. 무조건 연락 오니까."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월명공원 아래에서 김해경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과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문득 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김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두운 잎사귀가 바람처럼 불었다.
"이 대리." 김해경이 가만히 나를 불렀다.
지금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예전에...'로 시작하는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과장님."
"서울 가는 기차표가 없어요."
저 말만 빼고...
***
급하게 잡은 군산의 게스트하우스는 성인 남자 둘이 눕기 빠듯할 정도로 좁았다. 김해경은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이불을 깔자마자 자기 시작했다. 나는 울화통이 치밀어서 이불 끄트머리에 모로 누웠다.
작은 격자무늬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탁자 위에 동그랗게 떨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에 놓인 말랭이마을 엽서를 뒤집었다.
그리고 세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커버이미지 :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4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