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정 Aug 06. 2024

가장 따끈한 낭만, 대전

세월이 지나도 나는 변하지 않아

김해경과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이태원역 에 앉아 우중충하게 뜨는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찢어진 그물망을 입은 한 무리의 스무 살짜리들이 정장에 넥타이에 구두까지 신은 김해경과 나를 삐딱하게 곁눈질했다.

 

"우리는 저들의 경쟁자가 된 겁니다." 김해경이 설명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하지 않고 흙이 묻은 구두를 털었다.


태양은 영화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 나이에 밤새 놀았다는 자괴감과 잠이나 자고 싶은 피로감, 그리고 오늘 하루를 날렸다는 허탈함 꾸물꾸물 불어왔다.


"이따가 브런치나 먹으러 가죠." 김해경이 시계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졸음과 피로로 절여져 있나는 귀를 의심했다.


"과장님, 지금 새벽 다섯 시예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스무 살이에요?"

"집에서 자고 와요." 김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두 시간 자고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고요?"

"뭐 먹을 거예요?" 김해경이 물었다.

"먹을 건지부터 물어보세요." 내가 기가 막혀서 외쳤다. "그리고 그 브런치라는 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같은 것 아닌가요?"

"빵 먹죠. 용산역에서 봅시다." 김해경이 간단하게 말했다.

"용산역에 빵집이 있어요?"


나는 왜 이걸 물어보고 있는 걸까?


"아홉 시에 대전행 기차가 있어요." 김해경이 핸드폰으로 기차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는 김해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전행 기차가 무슨 상관이에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물었다.

"빵 먹으러 가자면서요."

"... 빵을 먹으러 네 시간 뒤에 대전을 간다고요?"

"더 빠른 기차는 매진이에요." 김해경이 기차표를 간단하게 말했다.

"과장님." 내가 멍하니 말했다.

"잘 들어가시고요." 김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는 대전에 가본 적이 없어요." 내가 얼이 빠져서 더듬거렸다. "그런데 이 지경이 돼서 아침에 빵을 먹으러 대전에 간다고요?"

"아홉 시에 봅시다." 김해경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만요, 과장님!" 내가 소리를 질렀다. "방금 생각났는데 저는 KTX 타본 적이 없어요!"

"축하합니다." 김해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대전까지 기차 타면 계란 삶아가야 되나요? 뭐 챙겨가요?" 내가 절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핸드폰이요." 김해경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고는 골목 뒤로 사라져 버렸다.




집에 도착했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오는데 잠은 완벽하게 달아난 전형적인 각성 상태였다.


나는 패닉에 빠져 자취방을 서성거리다가 핸드폰으로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연락이 끊긴 동우에게 냅다 전화를 걸었다.


'형! 결혼하는구나!' 동우가 전화를 받자마자 외쳤다.

"아니야." 내가 초조하게 말했다.

'날 안 잡았어? 형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형수님한테 그냥 '네'랑 '감사합니다'만 하라니까?'

"파혼했어. 나 아는 사람이랑 대전 갈 것 같은데, 너 대전 살지?"

'?'

"대전 가서 뭐 해야 돼?"

'형 미쳤어? 지금 파혼보다 심각한 게 아는 사람이랑 대전 오는 거야. 대전에 왜 와?'

"어쩌다가..."

'어쩌다가는 신종플루 걸렸을 때 쓰는 말이고. 여자친구가 대전사람이야? 형 결혼하는구나!'

"한다고. 대전 가서 뭐 해야 ?"

'형, 노잼시티에서 하긴 뭘 해. 성심당 갔다가 엑스포 다리 보고 칼국수 먹고 서울 가. 근데 난 서울 칼국수가 제일 맛있더라. 서울 빵이랑 서울 회랑 서울 돼지국밥이랑,'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알람을 맞춘 뒤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 분도 자지 못하고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렇게 나는 핸드폰만 들고 토요일 아침 아홉 시에 대전행 기차를 타고 말았다.


김해경이 보낸 기차표에 적힌 플랫폼으로 가서 불안하게 좌석을 찾자 김해경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해경은 심지어 잠도 자고 나왔는지 멀쩡하고 멀끔해 보였다. 나는 못마땅하게 김해경의 옆에 앉았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부루퉁하게 물었다.

"뭐가요." 김해경이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KTX 처음 탄다고 했으면 저기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탈 수도 있잖아요." 내가 따졌다.

"여자친구예요?" 김해경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얼굴로 차단했다.


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중얼거리다가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정신을 놓아버렸다. 극적이고 귀한 단잠에서 눈을 뜨자 어느새 대전역이었다.


브런치인지 나발인지를 먹으러 아무 빵집에나 들어가려는데, 걷다 보니  놈의 빵집 줄이 롱스톤 백 마리 이어 붙인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곳이 대전의 성심당이었다.


세희는 유명한 곳은 어디든 좋아했다. 줄을 서면 설수록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세희와 이곳에 왔으면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다 못해 불만과 거부의 의사를 온몸으로 내뿜으며 마지못해 세희를 따라 줄을 섰을 것이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만히 그 빵집 앞에 줄을 섰다.


나는 성심당에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쓸어가는 빵을 엉거주춤하게 골랐다. 사람들은 전쟁 난 것처럼 빵을 육십 개씩 종이가방에 담아 갔다. 근처에 탄수화물 중독치료 센터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나와 김해경은 빵집 창가에 나란히 옆으로 앉아 절대 서로를 보지 않고 눈앞의 빵을 먹어치우는데 집중했다.


쟁반에 한가득 쌓인 빵은 따끈하고 달고 풍성했다. 짭짤한 명란의 맛도 났고, 든든한 부추의 향과 바삭한 소보로의 결은 아득할 정도였다. 걸신들린 것처럼 빵을 먹고 있는데 젊은 여자들이 우리를 빤히 보면서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자리 없어서 옆으로 앉은 거라고 써놓던가 해야지." 나는 불만스럽게 명란 바게트를 입 안으로 몽땅 밀어 넣다. "이 초코 튀소 어쩌고 하는 건 과장님 드세요. 못 먹겠어요."

"왜요?"

"너무 달 것 같아요. 이런 건 안 먹어봤어요."

"안 해 본 거 하고 살아요."

"왜요?"

"안 해 본 거니까요."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초코 튀김 소보로를 먹었다. 아, 너무 달아서 너무 맛있었다.


빵을 먹고 대전역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주인 남자만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주인이 메뉴판을 가리켰다. 그런데 메뉴판에는 메뉴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 촬영 대신 커피를 느껴주세요. 커피를 내릴 동안은 주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그가 커피를 다 내릴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가, 우리를 향해 돌아서고 나서야 뜨거운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주인 남자는 커피 주문을 받자마자 다시 커피를 내리는 무아지경에 빠졌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김해경과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성인 남자 둘이 앉기에는 너무 비좁고 어두운 구석에 말없이 앉았다.


"가치 있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김해경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대전역으로 가죠." 김해경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 벌써요?" 내가 우뚝 멈춰 섰다.

"왜요?" 김해경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다리..." 내가 우물거렸다.

"뭐요?"

"엑스포 다리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해경은 잠깐 나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엑스포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김해경을 따라 뒤에서 걸었다.


날이 조금씩 저물어갔다. 이내 엑스포 다리가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엑스포 다리는 찬란한 불빛과 웅장한 분수를 계절처럼 뿌리고 있었다.  사이로 래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So you don't cry for me

세월 지나도 난 변하지 않아...

And then I cry for you

이 밤 지나면 이젠 안녕, 영원히...


사람들이 가만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에 맞춰 불빛이 넘실거렸고 분수가 춤을 췄다. 고요하지만 거대하고, 단정하지만 웅장한 공연장에 온 것 같았다. 나는 엑스포 다리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다가 김해경보다 먼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처음 방문한 낯선 도시에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한참을 걸었다. 이번에는 김해경이 나를 뒤따라왔다. 말없이 한참을 걷는데 저 멀리 '둥지 아파트'라는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보였다.


"둥지 아파트래요." 내가 중얼거렸다.


김해경이 고개를 돌려 둥지 아파트를 보았다.


"진짜 낭만적인 노래는 <둥지>에요." 내가 불쑥 말했다." 

"이 대리 몇 년생이에요?" 김해경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둥지>는 그러잖아요.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그리고 나는 세희에게...


나는 둥지 아파트 앞의 횡단보도를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멈춰 서서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무슨 생각해요?" 달리지도 않고 어느새 옆으로 온 김해경이 조용히 물었다.

"동우가 틀렸다는 생각이요." 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누가 대전이 재미가 없대, 진짜 낭만이 여기 있는데. 빵은 따뜻하고 커피는 가치 있고 엑스포 다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둥지는 다 해주겠다고 약속하는데..."

이전 16화 음악과 희미한 빛과 사랑이 흘러나오는 골목, 이태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