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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23. 2024

결혼 좀 하겠다는데 왜 결혼에 눈 돌아간 사람 취급해요

자기들도 기를 쓰고 결혼했으면서

나는 그때 김해경이 나에게 어디 이태원 유흥가에서 마약상이라도 소개해서 파혼의 고통을 잊게 해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지만 무슨 미국 십 대 파티광들이나 하는 방식으로 내 실연을 달래려고 하다니, 나는 김해경 같은 사람에게 파혼을 고백한 내 경솔함을 몹시 후회하며 울적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한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이태원까지의 경로를 몇 번이고 검색했다. 나는 그전까지 이태원에 가본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잘 알지도 못하는 저런 (이상한) 과장님과 그런 유흥가에 가는 것이 어쩐지 자꾸만 옳지 않게 느껴졌다.


퇴근하고 집에 틀어박혀야 하는 금요일 저녁에 자진해서 그런 정신 나간 동네로 다는 것도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도망쳐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도저히 약속을 파토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파인애플이 탈북자를 바람 맞혔다는 소문이 도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결국 나는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얼떨떨하게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을 수도 없이 확인하며 핸드폰을 생명선처럼 꼭 쥐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이태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면서 다시는 이런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일은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유흥은 단지 내가 너무 특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어쩌다가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내려야 하는 지하철역 말고도 몇 가지를 더 되뇌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 처음부터 뚜껑을 딴 채로 가지고 오는 술은 마시지 않는다, 오늘 누군가 자기를 소개하며 말하는 직업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오늘 경찰서에 가게 되면 무조건 김해경을 끌어들여 혼자 죽지 않는다... 


이태원역 앞에서 시계만 보고 있던 김해경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말없이 돌아서더니, 그 긴 다리로 좁은 골목과 계단을 성큼성큼 비집고 들어갔다.

 

각오한 일이었으나 김해경을 따라가는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렸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가? 머릿속에서 레이저 미러볼 아래 헐벗은 사람들이 이상한 음료를 마시고 가마우지 소리를 내며 눈이 풀린 채로 마오리족 춤을 췄다. '아 유 이태원 퍼스트? 유 인생 이제 피니시'...


아니야, 약만 안 하면 돼. 담배도 못 피운다고 하면 되고, 인신매매도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아, 운동해 둘 걸... 침착해지려 애를 썼으나 자꾸만 입 안이 마르고 눈앞이 흐려졌다.


앞장서서 나를 지옥의 마오리족에게 데려가는 김해경은 뒤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어찌나 관심이 없는지, 내가 갑자기 싱크홀에 빠져도 모를 것 같았다. 실제로 김해경이 너무나 빨리 걷는 탓에 뒤따라가던 내가 몇 번이고 휘청거렸으나 김해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를 클럽이 아닌 만두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이런 것이 유흥의 전초전이구나 싶어 어색하게 김해경과 만두집에 마주 앉았다.


앉고 보니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목례만 하던 사이였고, 그것도 복도에서 서로 반대방향에서 걸어올 때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던 자기 방어적인 목례였기 때문이었다.


김해경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저는 이 회사의 복지인데요'가 생각나 몹시 괴로워졌다.


나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 가벼운 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또 패착이었다. 김해경이 말없이 듣기만 하자 나는 점점 할 말이 많아졌고, 말이 빨라졌으며, 곧 정신없이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김해경에게 파혼을 당하기 전까지 내가 열심히 노를 저어 갔던 결혼의 단계, 입으려던 예복, 예약한 결혼식장의 식대와 주차, 계약금을 날려먹은 웨딩 촬영, 엄마가 고속버스에서 벌벌 떨며 품에 안고 온, 보자기에 싼 꾸밈비인지 뭔지 하는 현금 천만 원, 종로에 가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중량 추가금("실수로 너무 잘 만들어버려서 팔만 원 더 주셔야겠는데?")을 뜯겨가며 맞춘 예물에 대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떠들어댔다.


"그 결혼식장 밥 맛없어요. 거기서 할 바에야 애슐리 가는 게 나아요." 김해경이 간단히 말했다.


"나는 그냥 결혼을 하려던 것뿐이에요." 내가 소리를 질렀다.


"축하합니다." 김해경이 엉겁결에 말했다.


"다 하잖아요. 과장님 같은 사람 아니면 다 하려 한다고요. 자기들은 다 하면서 왜 결혼하려는 사람을 결혼에 눈 돌아간 사람 취급해요?" 내가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댔다.


"실제로 눈 돌아간 것 맞잖아요." 김해경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과장님은 왜 안 해요?"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김해경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에게 어떤 상대를 만나려 하는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이요, 나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요, 하고 말하려는데 그때 쟈니덤플링의 송이 군만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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