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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30. 2024

음악과 희미한 빛과 사랑이 흘러나오는 골목, 이태원

이태원에서 잃어버린 인생의 부품은 영영 찾을 수 없다

이태원의 쟈니덤플링을 먹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에게 메뉴판에 적힌 번호를 주문한다. 예를 들면 '새우 물만두, 군만두, 송이 군만두'라고 하는 대신, '1, 2, 8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문하면 '나는 만두를 먹기 위해 작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널리 알릴 수 있다.


만두를 주문하고 오 분 정도 기다리면 열 개가 그대로 판째 들러붙은 뜨겁고 노릇한 갈색 군만두가 나온다. 방금 튀긴 군만두를 보면 회사에서 때리고 싶은 사람 같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완벽하게 전유할 수 있는 눈앞의 음식, 그것을 먹기 직전의 충만함, 그리고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는 나의 행운과 행복만이 밀도 있게 느껴진다.


송이 군만두 한 개를 입에 넣으면 여름날 사우나 앞을 지날 때처럼 송이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송이와 고기의 즙이 입 안에서 뜨겁게 터진다. 숨도 쉬지 않고 열 개를 다 먹는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나는 그 송이 군만두 때문에 파혼에 대해 남김없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나간 파혼은 다가올 만두보다 덜 중요한 것이었다.




김해경은 쟈니덤플링에서 나오자마자 돈 받으러 가는 사람처럼 다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김해경을 따라 종종걸음 치며 뛰듯이 걷던 나는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반기에 응모했던 문학상 공모전 당선작 발표였다. 이것이었나. 나는 문득 나를 급작스럽게 덮쳤던 거대한 불행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이 이 극적인 결말을 위해 치른 값이었나? 긴장으로 배가 알싸해지고 가슴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숨도 쉬지 않고 게시글을 눌렀다.


탈락이었다.


몸이 천천히 더워졌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느려지며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나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 김해경을 따라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김해경이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해경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멀건히 서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울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들의 향연이었다. 파혼을 당하고, 잘 모르는 회사 과장님에게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추태를 부리고, 파혼을 누가 그렇게 하냐며 남산 뒤로 끌려와 만두를 먹고, 문신 가득한 집 없는 애들이 지나다니는 용산 길바닥에 서서 울고 있다.


내가 눈물을 쏟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군대 천막 같은 바지를 입은 여자애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어떤 남자 하나가 그러지 말라며 김해경을 나무랐다. 나는 그제야 심지어 여기가 이태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나는 누가 봐도 김해경이 어지자 해서 우는 사람 같았다.


나는 거기서 나를 측은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힘조차 없었다. 차인 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을 틀어막고 속닥거리는 남자들을 보자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약해빠진 나 자신이 지긋지긋했고 나라는 인간 자체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파혼해서 우는 거 아니에요!" 나는 억울한 마음에 김해경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울음 때문에 '파홍해서우능거아니에혀'로 들렸다.


"안 물어봤습니다." 김해경이 일말의 관심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진짜로 여자 때문에 우는 거 아니에. 문학상 공모전 떨어져서 우는 거예요!" 내가 꺼이꺼이 울며 외쳤다.

"뭐가 어떻다고요?"

"또 떨어졌다고요!"

"그래서요?" 김해경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뭐 어떻게 할 건데요?"


아니 저 인간은 지옥에서 왔나? 방금 공모전 떨어져서 울고 있는 사람한테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우는 것도 까먹고 생각해 보니, 공모전을 계속하는 것 말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나는 김해경을 따라 휘황찬란하고 붉은 이태원을 밤새 걸었다. 흑인 여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러쉬에서 비눗방울이 불어오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춤을 췄고, 가발을 쓴 젊은 남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갔다. 술에 취한 백인들이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Journey의 Don't Stop Believin'을 고래고래 따라 불렀다.


건물 사이, 지하실, 불 꺼진 골목, 잠긴 옥상, 어디서든 음악과 희미한 빛과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거리를 김해경이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죽을까' 같은 평범한 생각을 하며 뒤따라 걸었다.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가, 방금 위기를 겪고 한 단계 나아간 사람이었다가, 다시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었다가, 그래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가, 벌어진 상처가 흉터로 변해가는 통증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는 새벽 다섯 시까지 이태원을 걸으며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만취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나는 구름 높이까지 뭉게뭉게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맨홀로 곤두박질쳤고, 다시 중얼중얼 기어올라와 집에 가서 쓸 소설에 대해 생각했다. 나중에는 김해경이 결혼을 했는지, 왜 사만 명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파혼의 순서에 대해 그렇게 빠짐없이 정확히 알고 있는지도 상관이 없어졌다.


나는 그날의 그 분위기와 내 불행에 너무 취해있었고, 그와 동시에 내 인생의 뻥튀기 기계가 아주 미묘하고 기이하게 뒤틀려버린 것을 목격했다.


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나는 분명히 그것을 느꼈고 그 순간을 불이 붙은 것처럼 강렬하게 감지했다. 인생의 부품 하나가 삐걱거리다가 빠져버렸고, 나는 그 뒤로 그 부품을 영영 찾을 수 없어졌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 순간에 인생의 역마살이 붙었던 것 같다. 그냥 붙은 것도 아니고 아마 새벽에 김해경에게서 옮겨 붙었을 것이다. 패착이었다. 회사 사람과는 새벽까지 놀면 안 된다.


그러나 정말 놀랄 일은 그 다음 날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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