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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Aug 13. 2024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정동진

그만둘 수 없다. 죽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이태원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대전 당일치기로 다녀왔지만 내게는 여행의 소회를 털어놓을 여자친구도, 사진을 업로드 할 인스타도, 여독을 푸는 능력도 없었다. 요일 내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잠을 잤다. 그리고 돈 받으러 온 사람처럼 월요일이 찾아왔다.


회사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나 혼자 기상천외하고 비현실적인 토끼굴 아래에 뚝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왜 회사에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극렬한 반항심과 무력감, 그리고 이상한 상실감이 동시에 스크류바처럼 꼬여 올라왔다.


오전 내내 의자를 젖히고 소박맞은 데릴사위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데 김해경이 사무실로 찾다. 나는 잽싸게 모니터 뒤로 숨었다. 옆자리의 한 주임이 커피를 마시다가 엉겁결에 같이 모니터 뒤로 숨었다.


"주임님은 왜 숨어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숨죽여 말했다.

"이 대리님은 왜 숨는데요?" 한 주임이 해경을 훔쳐보며 속닥거렸다.

"돈 빌렸어요." 내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김해경은 언제나처럼 최 부장을 정신없이 웃겨주고는, 거북이처럼 눈만 가리고 있는 내 쪽으 시선도 주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김 과장님은 결혼을 몇 번 을까요?" 한 주임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결혼을 하긴 했대요?" 은편에 앉은  대리가 불쑥 물었다.


나는 모니터에 은 초콜릿 자국을 유심히 보는 척했다.


"저렇게 생겨서 저러고 다니는데 한 번도 안 했겠어요?" 한 주임이  잘라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는 초콜릿 자국을 뚫어져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렇긴 한데 저게 어떻게 유부남의 스케줄이란 말인가, 노숙자의 일상이지.


"애기를 혼자 다고 들었어요." 여 대리가 속닥거렸다. "퇴근하면 애기 보느라 잘 나가지도 못하신대요."

"와, 이건 진짜 웃긴데." 내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한 주임과 여 대리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가 방금 입 밖으로 말했나요?" 내가 침착하게 물었다.

"이 대리님, 김해경 과장이랑 친해요?"

"제가요? 아니요? 왜요?"


***


나는 김해경과 회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김해경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게 말을 걸기는커녕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쳐도 이태원에서 만나기 전처럼 형식적인 목례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김해경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어쨌든 상급자였고, 나에게는 옆 사무실의 과장에게 들러붙을 수 있는 사회성이 없었다. 최 부장은 뭘 알기라도 하는 건지 복사기를 차고 있는 내 옆에서 MZ가 어쩌고 하면서 전 세계인이 다 들을 수 있는 크기로 혼잣말을 했다. 김해경이 사무실로 오면 나는 죽은 화분을 관찰하는 척했고 김해경은 태연하게 최 부장과 놀다 갔다.


나중에는 내가 김해경과 함께 대전을 간 것이 혹시 꿈이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된 것 같았다. 이태원 한복판에서 내가 질질 짠 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타임루프라고 하기에는 내 옆에 여전히 세희가 없었다.


나는 기계처럼 출근만 할 뿐 모든 사람들의 모든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회사를 다녔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도 전념할 수 없었다. 내 존재가 의심스러워졌고 삶의 이유가 뿌리째 흔들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글이 있었다.


나는 왜 글 쓰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나는 그 불행에 끊임없이 매몰되었고, 내 영원한 실패에 몰두해 집과 회사를 왔다갔다 하기만 했다. 


세희가 떠난 자취방은 금세 더러워졌고 다시 곰팡이와 먼지와 날파리가 생겼다.


***


"저녁에 뭐해요?"


김해경이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은 또다시 금요일 오후였다.


사람 취급도 안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할 말인가 싶었지만 골이 송연할 정도로 낯익은 상황이었다.


"왜요?" 나는 시감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며 물었다.

"퇴근하고 정동진이나 가려고요."


나는 할 말을  말았다.


"미친 거 아니에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금요일 저녁에 정동진을 가면 서울에 언제 와요?"

"다음날 오겠죠." 김해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


나는 다시 KTX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십몇 년 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던 기차를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계획 없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대전으로 갈 때는 KTX에 타자마자 정신을 잃어 양탄자를 타고 있는지 인력거를 타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번에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창밖을 볼 수 있었다.  온통 어두웠다. 검은 창에 비친 나를 보자 갑자기 가슴에 작은 풍선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정동진이 어디인가. 출과 새벽 기차와 낭만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패딩점퍼 속에 끌어 채, 무엇을 갈구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하는 바다가 아니던가.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와 노래와 시와 소설에서 수많은 방랑자와 이별자가 이곳으로 가서 겨울바다에 여행가방을 버리고 오지 않던가.


막연하기만 했던 동경의 장소를 이렇게 이상한 사람과 이렇게 화나는 이유("퇴근하고 정동진이나 가려고요")로 가게 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나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이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정동진은 무궁화호 타고 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김해경은 내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 해 보는 것 같았다.


"요즘은 무궁화호 타고 안 가죠." 마침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왜요?" 내가 얼른 물었다.

"글쎄요, 세상에서 제일 느리니까?" 그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때 KTX가 갑자기 멈춰 섰다.


"고라니 쳤어요?" 내가 헐떡거렸다.

"아뇨." 김해경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기차가 번개를 맞은 것 같은데요."

"과장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우리 열차는 갑작스러운 낙뢰를 맞아 탈선하여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열차에서 내려 주시기 바랍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김해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차 밖으로 내렸다. 나는 혹시나 김해경이 나를 버리고 갈까 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딘데 갑자기 내리라는 거예요?" 내가 허둥지둥 김해경을 쫓아가며 말했다.

"진부령이네요." 김해경이 창밖을 살폈다. "차라리 고라니가 지나가서 멈춘 게 나았을 텐데 KTX가 낙뢰를 맞았군요."

"... KTX가 이렇게 쉽게 탈선하는 기차예요?"

"기차라고 매번 달리고 싶겠어요?"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 대리가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날이 일 년에 며칠인지 생각해 봐요."

"... 그럼 정동진까지 뭐 타고 가요?"

"못 가요."

"네?"

"구조버스 같은 게 올 것 같은데요."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밤 열한 시에 휑한 바람이 부는 진부령 어딘가에 멍하니 서서 구조 버스를 기다렸다. 뒤에 오던 열차들도 줄줄이 탈선해 거의 삼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덩그러니 부령에 서 있었다.


"이 대리 살면서 번개 맞아봤어요?" 김해경이 갑자기 물었다.

"과장님 설마 번개 맞아서 이렇게 되신 거예요?"

"마요. 난 죄지은 게 많아서 번개 치면 밖에 안 나가요."


구조버스는 급하게 달려온 관광버스였다. 나와 김해경은 관광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낙뢰, 탈선, 고립, 구조 같은 일련의 비일상적인 자극으로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김해경에게 나도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서 마구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늦은 시각의 긴장과 피로로 예민해져 모두 좌석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나도 입을 다물고 어두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나는 툼하고 노릇하게 구워 쌈장에 찍은 삼겹살, 기와 감자와 양파가 씹을 새도 없이 넘어가는 름진 짜장면, 리고 오늘 퇴근하고 했어야 하는 빨래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며칠 전 이태원에서 마주했던 나의 (202번째) 공모전 탈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이리도 불행을 자초하는가. 글만 쓰지 않으면 그럭저럭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책을 내려하는가, 왜 굳이 작가가 되어야 하려 하는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왔나...


세희와 헤어진 이후로 어떤 글도 쓰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세희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희와 만날 때도 어떤 글도 쓰지 못했으니까...


나는 세희를 만나기 전에 쓰다 말았던 SF소설(중간중간에 "그래서~ 이렇게 됐다고 치자!"라고 써버린 탓에 퇴고할 용기를 잃은)과, 공모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낙방한 애소설('너만 없으면 내가 왕세자비'와 '형수와 결혼해 줘'를 합친 재벌가의 형사취수제)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소설에도 나의 세계와 이상과 통과 광휘가 들어 다.


나는 다시는 그 소설들을 이어 쓸 수 없게 된 것인가. 내가 쓰다 만 수많은 미완소설들은 절대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노트북에서만 숨죽이다 죽어버리는 것인가.


***


원래는 KTX 안에서 숙소를 예약해야 했으나 개 같은 번개를 맞는 바람에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정동진에 떨어졌다.


나와 김해경은 야생곰에게서 겨우 탈출한 달밤의 베어그릴스 같은 심정으로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모텔 아무 곳으로나 들어갔다. 예쁘거나 깨끗한 곳을 힘들게 찾지 않아도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총각은 목표를 달성한 얼굴이네?" 모텔 주인 아줌마가 껌을 짝짝 씹으며 와 김해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나에게 방 열쇠를 주었다. 

 

나는 말없이 열쇠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부서져라 내리쳤다.


낙뢰에서 살아남고 진부령에서 탈출해 드디어 잘 곳까지 찾자 한 번에 긴장이 풀렸고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나와 김해경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한마디 말도 없이 샤워를 하고, 그대로 죽은 듯이 잠이 들어버렸다.


***


제대로 자려고 이불을 끌어당긴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꼬박 아홉 시간을 숨도 안 쉬고 잔 것 같았다. 김해경은 벌써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고 있었다.


나와 김해경은 어제 입은 정장차림 그대로 백사장을 걸었다. 이른 아침의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숨죽여 자고 있었다.

 

백사장에 홀로 서 있는 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유리로 된 고요한 아침의 정류장이었다. 정류장 안에 들어가 멀리 바다를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녹색 바다와 흰 모래가 무아지경이었다. 코가 욱신거리며 천천히 목이 메어왔다.


그만둘 수 없다. 죽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


나와 김해경은 대충 물회를 먹기로 하고 근처 아무 횟집에 들어갔다. 역시 예쁘고 깨끗한 곳을 찾지 않아도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홀가분한 심정으로 벽에 붙은 가격표를 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물회 하나에 이만 오천 원이에요?"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설마 남자 둘이 와서 다른 데 찾아다니자는 거 아니죠?" 김해경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비싸잖아요." 내가 항의했다.

"내가 사겠습니다." 김해경이 말했다.

"과장님이 왜 사요, 여자친구예요? 과장님이 기차표도 끊었잖아요."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자친구가 주로 사줬나 보죠?" 김해경이 덤덤하게 물었다.

"여기서 그 얘기는 왜 하세요?" 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했으면 됐어요." 김해경이 툭 말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졌다. 목 끝까지 뭐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세희에게 남김없이 주었나.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나. 아니면...


물회를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면서 두어 번 먹어봤을까, 회 썰고 고추장에 얼음 넣은 게 그렇게 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회에는 채 썬 야채와 살얼음, 가자미회, 그리고 얇은 문어가 올라왔다. 나는 젓가락으로 얼음을 깨작거렸다. 의외로 은은한 과일향이 났다. 천천히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그리고는 물회에 코를 박고 먹었다.


***


"이 대리 물회 안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지금까지 먹은 건 물회가 아니었다니까요."

"여행 오면 지나가는 꽈배기도 천년의 맛이에요."

"아니 꽈배기가 왜 지나가냐고요..."

"이 대리, 지금 밟고 있는 거 맞아요?"

"구두 신어서 그렇다니까요."

"혼자 구두 신었어요?"


더럽고 치사하다... 나는 중얼중얼거리며 정장 구두 차림으로 레일바이크를 힘껏 밟았다.


정동진의 레일바이크는 바다를 따라 길게 나 있었다. 어디를 달려도 바다고 모래고 하늘이었다.


"과장님."


일정하게 울리는 페달 소리 사이로 내가 불쑥 말했다. 김해경은 대답하지 않고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 결혼했어요?"


내가 페달의 속도를 올리며 말했다. 김해경은 여전히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 이곳을 찾는가.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다물고 페달을 밟았다.


***


밤바다의 백사장은 발이 푹푹 빠졌다. 한 시간 뒤에 기차를 타야 했다.


"오늘 올라가도 내일은 아직 일요일이잖아요." 내가 불쑥 말했다.

"그렇죠." 김해경이 말했다.


나는 모래를 발로 찼다. 김해경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포기한 심정으로 파도가 치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기차표 내일로 바꾸죠, 그럼."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 왜... 아니, 그게 가능해요?"

" 될 건 뭐예요?"

"... 어디서 자요, 그럼?"

"이 대리 길에서 못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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