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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Aug 27. 2024

결혼을 세 달 앞두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게

솔직히 구속당하고 싶었어

세희 씨, 당신이 이 편지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이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편지를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 자는 사람이 말하길,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원치 않는 편지를 받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 악몽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군산에 있습니다. 어째서 군산에 있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갑자기 군산에 있습니다. 근래 들어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를 아무 계획 없이, 아무 때나 찾아가, 아무 곳에서나 자고 있습니다. 여자와 온 것은 아닙니다. 함께 군산에 온 사람은 내 회사의 과장인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희 씨,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언제나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웨딩 촬영과 청첩장과 드레스에 대해서는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요.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 날은 우리가 파혼하던 날이었습니다.


당신은 결혼을 남김없이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본래의 나를 지우고 새로운 한 덩어리의 형체 없는 일부가 되어 사회적 목표의 달성을 향해 맹목적으로 진격하는 브레이크 없는 트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구속당하기를 은밀히 기대했습니다. 당신에게 휘어잡히면 내 본래의 성정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통제와 속박에서 오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결혼으로 상대에게 구속당하고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가정의 안락함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구속을 원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안락한 뗏목 위가 아닌 깊은 바닷속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안정을 참을 수 없는 불운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할 삼십만 원을 벌기 위해 밤새 파인애플을 자르는 야간근무를 하며, 나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에게는 본래의 나를 지워버릴 자신도, 당신과 엉겨 붙은 새로운 덩어리의 일부가 될 용기도, 출산과 가족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조금 더 나를 위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홀로 방에 누워 있을 때면 나는 언제나 당신과의 마지막 순간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때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조금만 더 참아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름다운 당신이 지금 내 팔을 베고 누워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또다시 당신을 놓칠 것입니다.


나는 결혼에 이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내 천장은 무너졌지만 당신의 세상은 바로 섰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주는 사랑을 받아낼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은 무량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세희 씨,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재회를 소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돌아와도 우리는 같은 문제로 다투고 같은 문제로 서로를 울게 할 것입니다. 간신히 결혼의 문턱을 넘는다고 해도 말 못 할 속앓이를 하며 애증의 지옥에서 살게 되겠지요.


사람들은 평판과 시선과 비평이 두려워 불행을 걷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숨통을 트이게 할 수 있다면 타인의 수군거림은 그야말로 무용한 것입니다. 나는 가끔 세희 씨의 친구가 모조리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친구들의 풍요로운 일상을 보지 않아야 세희 씨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은 세희 씨에게 좌절도 주었지만 환희도 주었으니까요. 그저 당신에게 기쁨이, 무한한 기쁨이 울창하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한 번도 가지 않은 지방 여행을 간 것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탈주에 가깝습니다. 나는 군산행 기차를 타기 일 분 전까지도 내가 군산에 간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집이 있는데도 자꾸만 길에서 자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달빛을 받아 편지를 썼습니다. 내 옆에서 자는 사람의 말대로 나는 밀린 방학 숙제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당신은 한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장 귀한 애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말들이 있나 봅니다.


답신을 소망하는 편지가 아니지만 혹여라도 당신 역시 비워내야 할 단어가 남아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쏟아내어 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어딘가에 살아있어서 남쪽이 이리도 뜨거운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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