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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19. 2024

과장님이 어느 유부녀와 열애 끝에 도피했다고요?

진취적이지만 비밀스럽고, 다정하지만 서늘하며, 친절하지만 번뜩이는

당시 김해경은 내 사무실도 아니고 옆 사무실의 과장이었는데, 그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김해경은 큰 키와 훤칠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젊은 남자였다. 그가 어쩌다가 이런 망해가는 회사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집에 5조 원대의 빚이 있거나 단군 이래 최대의 취업 사기를 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들에게 운동 대신 담배를 권장했고, 개 같은 거 될 대로 되라는 직원만 남아버려 모두가 흡연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김해경은 흡연실에서 가장 오래 놀면서도 유일하게 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담배를 피우지 못했던 나는 그런 김해경에게 은밀하고 내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담배 냄새만 맡아도 멀미를 해 버려 최 부장을 수년간 실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겠는가, 세상에는 높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김해경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런 소문이 나기도 어려운데 회식 때 불이라도 삼킨 모양이었다.


김해경은 가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타났다. 그는 우리 사무실에 들를 때면 최 부장을 양껏 웃겨주고 떠났고, 최 부장은 심심할 때마다 그가 언제 돌아오냐며 수시로 사람들을 들볶았다. 우리 회사가 구직 사이트에서 별점 0.5점을 받게 된 것에는 최 부장의 공이 절반이었다.


김해경은 시원시원하면서도 차가운 데가 있었고, 호탕하면서도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으며, 본인의 사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진취적이지만 비밀스러웠고, 다정하면서도 서늘했으며, 친절하지만 어딘가 번뜩이는 남자였다.


모두가 김해경을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 있는 거대한 동물을 궁금해하는 종류의 호기심이었다. 모두가 사자를 구경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자이지 내 귀에 캔디를 속삭이는 사자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압도되지 않을 정도로만 김해경과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김해경을 남몰래(그러나 모두가 알도록) 좋아하는 여직원들 역시 멀리서 손으로 입을 막고(그러나 큰 소리로) 속닥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오히려 김해경과 가까워져서 자신들이 상상한 부분 이외의 것들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김해경이 결혼을 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누구는 그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 누구는 그가 비혼주의자라고 말했다.


그가 전 아내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느라 파산해서 이런 회사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숱하게 애인을 갈아치운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어느 유부녀와 열애 끝에 도피했다는 지독한 소문도 있었다.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고 그 정숙한 애인이 간절히 결혼을 바라지만 김해경 쪽 집안의 반대가 극심하다는 무근설도 있었고, 잔인한 연애편지로 몇 개의 가정을 파탄 냈다는 섬뜩한 추문도 있었다.


알 만한 대기업에서 건너왔다는 말도 있었고, 정부 부처의 공직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출신성분을 알 수 없다는 풍설도 있었다.


졸업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불길한 루머와 월북을 했다는 낭설, 그리고 일본 태생이라는 풍문이 동시에 공존하는, 그야말로 희한하고 기묘한 인간이었다.


누구는 김해경에게 만 명의 인적 인프라가 있다고 했고, 누구는 사만 명의 연락처를 봤다고 했다. 김해경은 그 인맥으로 절실한 사람들에게 원하는 상대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왜인지 그렇게 만난 연인들 중에 끝이 좋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이래저래 흉흉한 소문이 도는 기이한 남자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파혼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목례만 하던 사이였던 김해경을 회사 복도에서 대뜸 불러 세웠다. 그리고 방금 파혼당했으니 여자를 소개해달라는 소름 돋는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


김해경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요?"


나는 그제야 그와 내가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유언비어를 하도 많이 들어 이미 그를 아는 사이처럼 생각해 버렸던 것이었다.


"누구였더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저요? 저는 이 회사의 복지인데요..." 나는 엉겁결에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김해경은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

"아, 파인애플." 마침내 김해경이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소문이란 이렇게 개 같은 것이다.


그런데 김해경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왔던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연락처를 쭉 펼치며 '자, 골라요, 싸다, 싸, 이천 원' 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그 신발 어디서 샀냐고 묻는 사람처럼 내게 어디서 파혼을 했냐고 물었다.


"뭐라고요?" 내가 멍하니 되물었다.

"어디서 파혼했냐고요." 김해경이 바쁘다는 듯이 물었다.

"... 집에서...?"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발끈하려 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 대리 원래 집에서 살아요?" 김해경이 불쑥 물었다.

"과장님은 대체 무슨 생활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쳤다.

"퇴근하고 이태원으로 와요." 김해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파혼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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