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정 Jul 18. 2024

일 인분도 하지 못하는 자기혐오의 늪

이렇게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다가 죽을 것이다

세상에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경험이 몇 가지 있는데, 방금 산 아이스크림 바닥에 떨어뜨리기, 직장 상사와 서로 머리채 뜯기, 그리고 파혼이다. 이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고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이고 전형적이었던 나는 파혼을 통보받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하다 하다 결혼까지 실패하다니, 내 화려한 실패 경력의 정점을 찍은 것 같았다.


나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졌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 서 있는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목표를 잃은 출근길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막 같았고, 날마다 멍하니 구식 모니터만 쳐다보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새우처럼 모로 누워 유튜브만 봤다. 샤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시간 넘게 일어나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 속 스크롤만 내렸다. 그리고 그럴수록 차곡차곡 우울해졌다.


나는 점점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자기 전마다 내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고, 눈을 뜰 때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버겁고 두려웠다. 글은 이제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다.


세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자취방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차갑게 식은 침대에 누워 날마다 천장만 바라보았다. 세희, 모든 것이 세희였다.


그러나 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희의 몸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지독한 불면증을 앓기 시작했다. 밤마다 세희의 꿈을 꾸었고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났다.


세희가 맛이 없다며 민망하게 중얼거리는 파스타에 얼굴을 박고 먹던 주말과,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이불속에서 서로를 맨몸으로 끌어안던 새벽과, 혼이 나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양말을 빨래통에 넣던 저녁과,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야식으로 시킨 치킨으로 건배를 하던 밤들이 생각났다.


세희는 아무 때나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가 아무 때나 나갔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몹시 보여주고 싶어 했던 세희, 어쩌다 태원과의 술자리가 밤늦도록 이어지면 태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오빠 이제 집에 보내주세요' 하고 혼을 내던 세희, 여섯 시면 병정 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눈썹도 그리지 못하고 서투르게 내 도시락을 싸던 세희, 내 책이 반드시 성공할 테니 그때는 백화점을 층마다 돌며 쇼핑백을 열 개씩 들고 다니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세희, 내가 간절하게 사랑했던 세희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외로울 때면 차라리 세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고독할 바에야 모른 척 이기적으로 연락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마저 없었다.


이렇게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다가 죽을 것이다. 연애도, 결혼도, 자식도 남기지 못한 채, 인간으로 태어나 일 인분도 하지 못하고, 회사 사람들이 버린 박카스와 믹스커피로 뻣뻣해진 고목처럼, 내게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만 잔뜩 먹고 비뚤어져 말라죽을 것이다.


나는 점점 심신 미약의 상태가 되어버렸고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가자 회사 사람들이 슬슬 하나둘씩 내게 바디 프로필을 준비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다들 집단으로 맛이 간 것 같았다.


"아니라니까, 이 대리 완전히 얼굴이 상했는데 뭘. 애인이랑 헤어졌구먼?" 최 부장이 우렁차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이도저도 아닌 웃음을 지었다.


"이 대리 요즘 파인애플 자르러 왜 안 내려가? 누님들이 이 대리 자몽으로 갈아탄 거 아니냐고 난리 났어. 이 대리 지금 만나는 사람 없으면 진숙 누님이 남동생 여자친구 소개해 주겠다는데 생각 있어?"
"아닙니다, 저는 치정이 싫습니다..."

"그래?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혼자 사는 총각이라고 그렇게 안 챙겨 먹으면 되겠어? 이 대리 얼굴이 우리 회사 유일한 복지인데 관리 잘하라고." 최 부장이 호탕하게 말했다.


"부장님, 요즘 그런 말씀하시면 큰일 나요." 복사기에 서류를 넣던 여 대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거 참, 요즘은 뭐 갑질이니 성인지하도 유난을 떨어대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이 대리, 기분 나쁜 거 아니지?"
"네."
"응, 그래. 내 방으로 믹스커피 한 잔."


내가 믹스커피를 타는 내내 여 대리는 복사기 앞을 서성거렸다. 잊고 있었다, 저 개 같은 복사기... 나는 여 대리에게 나의 업무 해태를 사과하고 복사기를 걷어찼다. 복사기가 서류를 물처럼 뽑아내자 여 대리가 감사하다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문득 고개를 들어 복도에 난 창을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는 옆 사무실 잘생긴 과장의 얼굴이 흘끗 보였다.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김... 나는 다시 모니터를 보다가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혼의 고통 때문에 하도 나를 외면하다 보니, 처음으로 회사에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볼 정신이 생긴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모든 것이 내 팔자를 바꾸기 위해 뻥튀기 기계처럼 맞춰 돌아가고 있던 것 같았다.


 남자가 바로 김해경이었다.




* 커버이미지: Pixabay

이전 12화 약혼은 이렇게 파탄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