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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Oct 08. 2024

평생 함께 할 사람을 안개 속으로 데려가는 일

누군가를 상당산성으로 데려간다면

세희의 결혼으로 나는 무력해졌다.


세희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세희를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한 채 긴 꿈속을 헤맸다.


가끔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희와 다시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세희에게 전화를 걸면 모든 것이 태엽처럼 되돌아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세희가 저녁에 치킨 먹자고 답장을 할 것 같았다. 러나 어쩐지 전화기를 들 수 없었다. 세희가 너무 멀리 건너가고 있었다. 세희는 드디어 결혼을 하는 사람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김해경의 집에 홀로 앉아 세희를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를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세희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빌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이대로 끝내지 말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아직도 나는 놓지 못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실현되지 않았다. 나는 거대한 상실에 짓눌려 어떤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나는 세희와 함께 늙을 줄 알았던 것 같다.


***


"이 대리, 청주 가 봤어요?"


미역처럼 거실 바닥에 붙어 있는 내게 김해경이 말을 건 것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였다.


"과장님, 저 지금 청주 같은 곳에 갈 기분이 아니에요." 내가 꼼짝없이 누운 채로 말했다.

"안 가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전생에 가 봤어요."

"청주는 세종대왕이 눈병을 치료하러 다녔던 곳입니다."

"제가 세종대왕이었나 봐요."

"그럴 리가요. 눈병이었겠죠."


천장에 붙은 하루살이가 나를 세상 쓸모없는 인간 보듯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주에 상당산성이라는  성이 있어요. 둘레가 4킬로미터는 넘을 겁니다. 두 시간 정도면 끝까지 걸을 수 있어요." 김해경이 차분하게 말했다.

"안타깝네요. 저 내일부터 족저근막염 생길 예정이라서요." 내가 없이 중얼거렸다.

"걷다 보면 많은  보여주는 성이에요."

"저 이제 과장님이랑 시체 빼고 안 본 게 없어요." 내가 꾸짖었다.

"이 대리, 다람쥐가 수년 동안 모은 도토리를 등산객에게 빼앗기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요?"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김해경을 쳐다보았다.


"화병이 나서 가슴을 칩니다." 김해경이 간단하게 말했다.

"... 다람쥐가 화병이 나서 자기 가슴을 킹콩처럼 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상당산성이 유명한 이유는 화병이 난 다람쥐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에요."


... 내가 진짜 이번 한 번만 속는다...


***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김해경은 나를 오래된 노포로 데려갔다.


"킹콩 다람쥐는요?" 내가 간절히 물었다.

"청주에 오면 이 음식부터 먹어야 합니다."


그건 고추만두국이라는 음식이었다. 청주가 매운 만두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고추만두국은 긴장했던 만큼 매운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저를 멈추지 못할 정도로 맵칼하게 당기는 맛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음식을 남김없이 비웠다. 속에서 뭔가가 서서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당산성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게다가 성곽이 어찌나 높은지 축축한 풀을 밟고 미끄러지면 그때부터는 낙하산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한참을 기어올라 간신히 성곽 위에 섰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늑목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막걸리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문화재에서 조난당하면 과장님이 책임지는 거죠?" 내가 희미하게 물었다.

"설마요.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건 본인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니까 자기만 믿으라는 사람들은 멀리해요."

"… 부모님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 있기만 하면 자기 역할은 다 한 거예요. 부모에게서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 말아요."

"… 제가 제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끝장나는 거죠. 그럼 뭐 결혼 같은 걸로 팔자 고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김해경이 가차 없이 말했다.


김해경이 망설임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성곽 위에 난 길이 너무 좁고 거칠어서 나란히 걷기 어려웠다. 나는 할 수 없이 김해경의 뒤를 더듬더듬 따라갔다. 김해경의 뒷모습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안개 속으로 기이하게 사라졌다. 나는 완전하게 혼자가 되었다.


안개가 자욱한 상당산성을 후들후들 걸으며 나는 세희를 생각했다. 세희를 이곳에 데려올 수 있을까. 아니다. 데려올 수 없을 것이다. 세희가 오기에는 너무 거칠고 미끄럽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발을 잘못 디디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곳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험한 길이다. 세희를 이런 곳으로 데려올 수는 없다.


이곳에 데려와야 하는 사람은 세희가 아니라...


나는 등을 세우고 조용히 성곽을 걸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발을 내딛고 끝이 없는 길을 기어올랐다.


나는 세희가 사라져서 무력해진 것이 아니었다.


나를 상실해서 무력해진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놓지 못한 것, 간절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것은 세희가 아니라 희미해져 가는 내 꿈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의 목표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고, 예전처럼 내 옆에 있어달라고 고 있었다.


이 자욱한 안개를 헤쳐 나가려는 사람, 미끄러질 것을 알면서도 상당산성에 오는 사람, 길을 헤매고 발을 헛디뎌 실패하는 사람, 그러나 다시 치열하게 기어오르는 사람, 내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세희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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