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연극
내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김해경의 집에 얹혀산 지 넉 달째, 물건들이 없어진다.
넥타이가 있던 자리에는 영화표가 올려져 있고 충전기가 있던 곳에는 피망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굴러다니던 볼펜은 영영 사라지고 곰인형이 달린 반지가 생겨났다. 도대체 피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집에 김해경의 전처나 파혼녀가 들락거린다고 확신하지만 증거가 없다.
김해경은 자기 집이 아닌 것처럼 가끔 집에 들어왔다가 나를 갑자기 기차에 태워 다른 곳에 데려다 놓기를 반복한다.
그는 내 몸에서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빼내고 있다.
건조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곰인형처럼 내 정신도 탈곡된다.
회사에서 나는 계속 바보이고 공모전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내 전화는 어떤 당선도 알리지 못한다.
친구들은 결혼식장으로 떠나가고 부모님은 과거에 갇혀 있다.
나는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지독할 만큼 고독하고 싶다가 처절하게 연대하고 싶다.
정신병이 올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피망도) 어떻게 진짜란 말인가?
모든 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연극임이 틀림없다.
세희가 신혼여행에서 신혼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 혼자 얻은 반지하 자취방에서 반으로 가른 뜨거운 바게트에 버터를 발라 먹다가 내가 생각나 편지를 쓴 것, 그러나 세희의 편지에 적힌 제안처럼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어 답장하지 못하는 것, 또다시 행복한 감옥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김해경의 집에서 홀로 중얼거리는 것...
자유로워져요, 이 대리.
김해경의 나지막한 말이 아무 때고 징처럼 울린다.
그런데 내 이름이 무엇이었지, 불안이었던가 환희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