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라는 호러
'넌 대체 이번 설에 어디에서 집으로 오는 거냐?'
날이 선 엄마의 전화를 비몽사몽 받으며 이불 위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무슨 그런 무서운 전화를 이 새벽에 해?"
'너 외국 사니? 지금 아침 아홉 시야.'
차가워도 이렇게 차가울 수가 없다.
"엄마, 토요일 아침 아홉 시면 직장인한테 새벽인 거 몰라?"
'그게 무슨 직장이야, 월 백구십만 원 주는데.'
"... 나 회사 과장님 집에 산다고. 그리고 백구십만 원 아니라니까 또 어디서 들어서 자꾸 백구십만 원이래. 백구십만 원은 뭐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여기 시골 개도 재롱부리고 백구십만 원 받아 가.'
"거짓말하지 마.... 무슨 재롱부리는데?"
'너는 대체 왜 너네 과장님 집에 얹혀사는 거야? 엄마는 너를 이해해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 과장님 총각이라며? 너 그거 굉장한 민폐야. 너 때문에 장가도 못 가고 남의 아들에게 무슨 짓이야?'
"그 인간 벌써 한두 번 갔다 왔을 텐데 무슨 민폐야."
'너, 세희 소식 없니?'
나는 이불 위에 다시 드러누운 채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엄마에게 차라리 세희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 이야기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 헤어진 애 얘기는 왜 자꾸 해."
'아까워 죽겠다, 아까워 죽겠어. 엄마가 아무리 생각해도 세희가 너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너네 파혼하기 전에 엄마가 신점 보고 온 거 얘기했지? 무당이 뭐라는지 아니? 너는 세희를 잡아야 된대. 그런데 세희는 너한테 잡히면 안 된다더라, 세희가 너무 아깝다고.'
"엄마, 첫째로 나는 그 사기꾼 아줌마가 등 긁으면서 그런 소리 찍 하고 엄마한테 십만 원씩 받아가는 게 너무 부럽고, 둘째로 그 아줌마 말이 맞다면 세희는 나랑 결혼하면 안 되지. 남의 집 딸한테 무슨 짓이야?"
'그러니까 더더욱 세희 같은 애를 잡았어야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것아! 아이고, 복장이 터져서 못 살겠다! 너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세희 걔가 인물 좋았지, 지 꾸밀 줄도 알지, 싹싹하지, 돈도 모아놨고, 나이까지 어린 데다 나한테 전화해서 곧 애기 가질 거라고 얼마나 야무지게 굴던 앤데!'
"아니 그걸 엄마한테 말하면 애기가 생기냐고."
'남자한테 아무것도 안 바라고 허우대 멀쩡한 거 하나 보고 결혼하는 애야!'
"엄마. 세희, 얼굴 보는 애야. 아주 지독하게 봐."
'이놈아, 이제 어떤 여자애가 너랑 결혼해 준다냐! 집도 없어서 상사 집에 얹혀살고 한 달에 백구십만 원 버는데!'
"엄마, 나 진짜 엄마 땜에 집에 못 내려가겠어. 무당집 아줌마랑 둘이 전 부쳐먹던가 해."
'얼씨구? 집에 안 오면 네가 갈 데라도 있어? 여자도 없는 게?'
"미안하지만 나는 명절에는 여행을 가지 않습니다."
김해경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평소에는 잘만 가시면서 왜요?!"
"남들 다 나갈 때 똑같이 해외로 나가는 건 현명한 여행이 아닙니다."
"... 저 집에 진짜 못 내려가겠어서 그래요, 과장님."
"가정의 불화는 안타깝지만 도로든 교통수단이든 관광지든 상당히 붐빌 텐데요."
"엄마만 없으면 쓰레기통 안도 괜찮아요."
"공항이 미어터질 겁니다. 여섯 시간 동안 공항에서 발 질질 끌고 앞사람 뒤통수만 쳐다보면서 수속 밟느니 간단히 어머니와 화해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자꾸 세희를 다시 만나라잖아요."
내가 마지못해 말하자 김해경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희 결혼한 거 집에 얘기 안 했어요." 내가 작게 말했다.
"이혼한 것도?" 김해경이 덤덤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김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과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 세희가 명절이라고 전화 왔다! 예전처럼 싹싹하게, 어머니, 하면서! 명절 잘 보내라고 세희가 집에 전화를 했어! 걔가 너 다 용서했나 보다, 이게 무슨 일이니! 여자 마음 풀리는 거, 오래 걸리는 것 같아도 순식간이라니까! 세상에, 내가 선녀보살한테 부적 받아온 게 효과가 있나 보다. 세희 핸드폰 번호 그대로더라, 너 빨리 연락해 봐. 얘가 왜 말이 없어, 엄마 말 듣고 있니? 기도 올린 게 이렇게 돌아오네, 올해는 정초부터 이게 무슨 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