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C의 발령 뒤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우리 계에 새로 온 직원들은 일은 서툴지언정 좋은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고 새로 터지는 민원들을 하나씩 처리해 갔다. 대체로 평온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나는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건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불현듯 시작되었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찾아들곤 하던 우울감과는 조금 달랐다. 여느 때처럼 금방 지나가리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헛헛함.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불안감.
그것은 업무에서는 어떻게 해도 채울 수 없는, 어떤 절실한 무언가였는데 딱히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나는, 시간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도무지 어찌할 도리없이 지켜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끝도 없는 나락 속으로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독서(만화책을 포함한)와 걷기는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이다. 때문에 회사의 복지 중 하나인 독서통신은 매달 신청기간이 돌아오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신청을 하곤 했다.
그날도 독서통신 사이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의 책부터 검색하던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의 이름을 넣고 엔터를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신간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옷-!
나는 입가로 흘러나오는 탄성을 삼키며 책 위로 재빨리 커서를 옮겨 클릭했다. 그런데 웬걸, 그건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이내 그 책을 신청했다. 기다리고 있던 소설은 아니었지만 그의 글이라면 무어든 좋았기 때문이다.
구청 앞 가로수길 좌우로 벚꽃들이 한창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봄날, 사무실로 책이 도착했다. 얼른 읽고 싶은 마음에 점심을 대충 먹어치우고 탕비실 구석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한껏 기대에 부푼 채 책을 펼치고 읽던 어느 순간이었다. 막 넘긴 페이지를 읽어내리던 나는 갑자기 전기에라도 맞은 듯 등줄기가 찌르르해짐을 느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고.
그러니 쓰고 싶으면 그냥 쓰라고.
그야말로 머리를 한방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까지만도 소설은 당연히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만의 특권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글이라곤 초등 때 써 본 일기가 전부인 데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 거진 손을 놓았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이라니.......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 문구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어쩔 수 없는 어떤 충동에 이끌린 채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종일 틈틈이 머릿속에서 짜낸 이야기 하나를 그저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써 내려간 A4 몇 페이지. 그것을 쓰는 내내 뱃속이 요상하게 울렁거렸다. 뱃멀미처럼 격렬하지만 기분 좋게 전신을 휘감는 묘한 쾌감과 희열.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마구 에너지를 뿜어 올리는 것 같았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어느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났다.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너무도 다급하고 강렬한 욕망.
이제껏 살아오며 다양한 욕구들이 있었지만 그때만큼 절실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선택의 여지라곤 없는 것처럼, 오로지 그것만 보이는 간절함.
에피파니(epiphany)!
감히 예술가들의 에피파니에 비유하자면 낯 뜨겁지만, 그것은 내게 어떤 계시와도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소설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런 맥락 없이 너무도 갑작스레 소설가란 꿈을 갖게 되었지만, 지방에는 마땅히 소설작법에 대해 배울만한 데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작법서를 빌려 읽어 보기도 하고 인터넷 강의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베이스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한 것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소설을 읽어치우며 맨땅에 헤딩하듯 글을 배워나갔다.
이후 조금이라도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한 달 여 만에 짧은 단편의 초고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물론 고쳐 쓰는 데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글의 완성도는 차지하고라도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글쓰기 자체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지만, 한번 자리에 앉으면 두세 시간씩 집중하는 데에는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했다.
그러면 깜냥도 안 되는데 그만 두면 되지 않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처음 써본 글 하나에 남은 인생의 절반을 거는 건 나로서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지만 마흔 넘어 뒤늦게 생긴 이 꿈을 나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그 꿈 때문에 살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필요한 것은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이 아니다. 그저 나다운 일을 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쌓아가는 삶을 원할 뿐이다. 그냥저냥 살아지는 것이 아닌, 간절히 바라는 것을 향해 치열하게 나아가는 삶. 그게 내가 꿈꾸는 삶이다.
언젠가 다시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미련도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다. 매번 텅 빈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을 나는 이제야 찾았으니까. 내 삶의 이유는 내가 만들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