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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31. 2019

[안식년 2화] 허난설헌과 서피 비치


[안식년을 살고 있습니다] 1화 양양/강릉 여행

강릉까지 2시간 반은 운전해야 하는데 아침부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새벽 수영을 간 오빠를 집에서 기다리며 이미 다 싸놓은 짐만 만지작거린다. 안식년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2개월.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가겠노라 결심하고 출발하려는데 왜 이리 불안한지.

우리는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안식년은 본래 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7년에 1년씩 업무를 벗어나 쉬는 제도라고 하는데 성직자도 학자도 아닌 우리는 그들과 달리 지속적으로 주는 월급도 없이 깡으로 1년을 쉬기로 했으니 상황이 조금 다르다. 게다가 주변에서 안식년 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더욱 불안하다. 하지만 돌아보면 7년 직장생활에 2년 자영업(2년 자영업은 7년 직장생활보다 힘들었으니 곱절로 쳐주어야 한다.) 남들보다 다양하게 겪었고 그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려왔으니 학자들과 성직자들보다 더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덜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안식년이 필요하다.

오빠,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괜찮겠어?
비 많이 오면 천천히 가면 돼.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가고 하면 되지. 게다가 휴게소 음식은 맛있지 않아? 난 통감자 구이 먹고 싶어.
그럼 난 떡꼬치 먹을래.

안식년은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가다 잠시 쉬었다 가는 인생의 휴게소다.

빗속의 산책. 허난설헌 생가

잠시 개었던 하늘은 오늘의 첫 목적지인 허난설헌 생가에 도착하자 다시 비를 내렸다. 어차피 젖을 것이라 예상하고 조리만 챙겨 왔다. 생가는 그리 넓지 않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하며 입장했다. 듣던 대로 허난설헌 생가는 작은 공원 같았다. 허난 설헌이 동생인 허균과 7살 때까지 뛰어놀던 곳이라고 한다. 생가 뒤로는 고즈넉한 솔숲이 이어지는데 사실 생가보다 이 솔숲 산책이 더 인기인 듯했다. 많은 이들이 솔숲에 있었다. 우리도 자연스레 생가를 둘러보고 솔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신고 온 슬리퍼가 문제가 되었다. 진흙이 된 바닥은 걸음걸음마다 슬리퍼를 잡아당겼고 급기야 종아리는 흙탕물 천지에 슬리퍼를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던 발등은 벗겨지기 시작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생가 옆 카페가 생가보다 더 북적이는 이유가 있었다. 역시 다들 거기 가 있는 이유가 있었어. 오랜만에 시간 내서 온 여행을 망친 것 같아 급기야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불안정한 내가 되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오빠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만 가고 싶어?
나도 테라로사 가서 커피 마시고 싶어 (눈물 찔끔). 산책 싫어
요즘 불면증 때문에 고생이면서 커피까지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좀 쉬었다가 움직이자.

‘올해는 안식년으로 쉴 겁니다.’ 하고 용감하게 선언해 놓고 왜 이리 불안한지. 불안함은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벌겋게 쓸린 엄지발가락으로 인해 고통으로 점점 난폭 해진 저를 다독여 안채 툇마루에 앉다. 벌겋게 벗겨진 발등을 보니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왜 난 다른 사람들처럼 장화나 운동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일까.

똑. 똑. 똑.
또또또 또또또

오빠 뭐 하는 거야. 내 발 찍는 거야?
아니야. 빗소리 녹음해. 잘 들어봐.

처마에서 빗방울이 무겁게 모여 떨어지는 ‘똑’ 소리. 처마를 거치지 않고 각각 떨어지는 가벼운 ‘또또또 또또또’ 소리. 두 가지 소리가 나름의 강약을 표현하며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불안정했던 마음이 빗소리에 조금 가라앉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작은 일에 신경질이 난 것일까. 언제부터 나는 대다수가 하는 선택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까. 무엇이 그리 불안한 거니,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빗소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두들기며 떨어진다.

한 방울 한 방울 힘을 모아 열심히 떨어지는 빗소리는 내 마음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이별로 성별로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 살고 있다. 지금쯤이면 회사에서 과장쯤 달고 적당한 월급을 받으며 아이를 키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도 아이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을 살기로 선택했을 때부터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마음속에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평소에는 괜찮다며 조용히 잠자고 있던 불안감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시간이 오면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끝없이 가라앉혔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영향을 끼쳐 간신히 마음잡고 사는 사람까지 힘들게 했다. 남들처럼 가지 않는 이 길이 너무나 두려웠다. 특히 식당을 하던 시기에는 종종 갑작스럽게 스스로를 방전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올라와 우울해지기도 했다.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으나 두렵기도 한 시기였다.

다수의 선택이 항상 정답은 아니야. 그동안 남들이 하는 대로 해서 행복했던 적이 없잖아.
그동안 우린 너무 힘들었어. 이제 잠시 쉬어 가자. 이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야.

빗소리에 마음을 달랜 아내는 남편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조용히 따라간다.

아침 산책. 고요한 서피 비치

준비물은 약간의 돈과 핸드폰 하나, 숙소 키. 밤새 피곤에 부은 얼굴로 서로의 눈곱만 체크하고 숙소를 나선다. 아침 7시지만 이미 해는 햇살과 열기를 한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 흘려보내기로 한 땀, 싹 쏟고 나면 상쾌하겠지. 씻지 않은 얼굴에 대충 바른 선크림이 들뜨기 시작하고 꼬질 꼬질한 내 모습이 신경 쓰이지만 아침 산책은 원래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어제 잘 잤어? 여행 오면 원래 잘 못 자잖아. 근데 어제는 바로 자더라.
응 새벽에 맥주 때문에 화장실 간 거 빼고는 진짜 잘 잤어.
근데 그거 알아? 너 어제 화장실 간 다음에 나도 바로 화장실 갔다 왔어.
진짜? 몰랐어. 오빠는 계속 잔 줄 알았어.
발 안 아파? 어제 다 까졌다며. 슬리퍼로 한 시간 걷는 건 무리였나 봐

보통의 부부가 보통의 대화를 하며 숙소를 나선다

우리는 여행 가면 보통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아침 일찍 시작하는 여행은 우리에게 다른 풍경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 숙소로 가는 중에 본 서피 비치는 핫 플레이스답게 일상을 피해 달려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 7시의 서피 비치는 온전히 바다만 남는다. 텅 빈 해변과 파도, 그리고 서퍼들만이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 저기 빈백에 살짝 앉을까? 서퍼들 구경하고 싶어.
안돼. 여기 서피 패스 있어야 한대. 만약 누가 와서 검사하면 어떻게 해?
이 시간에는 검사 안 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냥 앉는데 뭘.
누군가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 우리 그냥 바닥에 앉자. 생각보다 괜찮아.

주인 없는 빈백에 앉아 셀카를 찍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모래 위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어제 입던 옷, 더러워져도 상관없었다. 양양의 파도는 거침없어 우리가 예상했던 파도 자리를 넘어 우리의 발까지 다가왔다. 발을 간지럽히는 파도를 느끼며 서퍼들을 바라본다.

10대일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파도를 기다린다. 좋은 파도가 오지 않을 경우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사리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이윽고 기다리던 파도가 오면 보드에 폴짝 올라가 파도를 탄다.
한 20분은 꼼짝 않고 서퍼들을 구경했다.

8년간의 사회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단언한다. 한순간도 꾀부리지 않고 잘해보기 위해 열심히 살았으며 이에 맞는 성과도 여러 번 맛보았다. 하지만 26살 취업 지옥에서 선택해야 했던 직업은 실은 선택이 아닌 강요에 가까웠다. 잠시만 쉬어가며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 한심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땀을 한껏 흘린 후의 샤워는 너무나 상쾌하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낙산사에 잠깐 들렀다가 점심 먹고 집으로 가야 한다. 짧은 여정을 끝내고 일상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옅은 우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일도 쉬어갈 수 있는 안식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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