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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란 Dec 02. 2021

봄날

봄이 내게 온 줄 알았는데, 이제 와보니 내가 봄을 찾아갔다.

    회색으로 가득한 복도와 다르게 노란색이 가득한 음악실은 봄 향기가 난다.

연세가 있으신 음악선생님께서는 아직 소녀의 감성을 가지고 계시는지 음악실 복도는 회색 학교에서 유일하게 화분이 놓여 있었다.

빛을 보이며 색을 내는 꽃들, 살랑살랑한 봄바람, 잔잔히 불어오는 꽃보라,

그리고 피아노 소리.


    점심시간이면 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어른인 척하는 아이들답게 나가서 공을 차거나, 학교 때문에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채우는 아이러니한 행동으로 바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학교라는 공간과 대조되면서도 어울리는 듯한 차분한 소리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꽃으로 가득한 들판과 그곳에 있는 언덕. 피아노 한 대. 내 눈앞에 그려지는 모습들.

검은색 교복 바지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굳게 다문 입술과 감고 있는 눈을 가진 채 피아노를 만지는 기다랗고 얇은 손가락.


‘어떤 곡일까’하고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이니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다. 

그런데 익숙한 느낌. 마치 지금과 같은, 봄 같은.


피아노 덕분에 창가에 꽃들은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피아노와 같이 노래한다. 구경하러 온 것만 같았던 바람은 어느새 피아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이 무대 위에서 나라는 관객을 위해 준비한 노래처럼.


봄날의 노래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니, 봄이 내게 온 줄 알았는데.

이제 와보니 내가 봄을 찾아갔다.



회색의 복도를 지나 노오란 음악실로 들어가면 네가 있다.

피아노 소리는 나를 반겨주며

너는 굳게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나에게 봄을 말해준다.


꽃들은 살아 움직이듯이 고개를 흔들며 노래하고

꽃보라를 일으키는 바람은 네 옆에서 춤을 춘다.

화려하면서도 소소하게 ,

마치 둘만 아는 비밀처럼 이야기해준다.

봄이 왔다고, 네가 왔다고,

내게 속삭여준다.


어제는 오늘이었고

오늘은 내일이 될 별일 없던 하루에

봄과 함께 네가 왔다

아니, 내가 너에게 갔다.



    음악실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봄을 노래하는 내 손가락과 새하얀 건반을 타고 사랑을 연습했다. 서툴렀던 내 손가락만큼 우리 사랑은 서툴렀고 손에 익어갈 즈음 우리도 익어갔다.


“이 책 읽어봤어?”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책을 건네던 선생님은 점심시간마다 음악실에 오는 걸 좋아했다. 회색의 복도를 지나서 노란 음악실로 들어오던 모습, 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피아노를 치고 선생님은 피아노 소리에 맞춰 봄을 내게 말해줬다. 꽃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며 노래하고 꽃보라를 일으키던 바람은 내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춤을 췄다. 화려하면서도 소소하게, 마치 둘만 아는 비밀처럼, 선생님은 봄이 왔다고, 네게 왔다고 속삭여줬고 나는 봄에 다가갔다.


“누가 제일 좋아요?”


처음에는 수학이라는 과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절대로 풀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피아노를 좋아하던 선생님에게 음악실에 걸려있는 예술가들의 사진을 보며 물어봤다.


“ 다 좋지만, 그래도 한 명만 골라야 한다면 역시 쇼팽일 것 같은데.”


라흐마니노프가 떡하니 앞에 있는데 쇼팽을 고르던 선생님을 보고 처음에는 한숨을 내뱉었다.


“쇼팽이요? 녹턴(Nocturne) 때문에요?”

“응. 엄청 유명한 곡이잖아, 맞지?”

“네, 뭐. 유명하기는 하죠. 그런 게 좋아요?”

“응.”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나를 졸라대며 피아노를 쳐달라고 아이처럼 떼를 쓰고는 했다. 선생님이 웃을 때면 우리의 나이를 실감하게 되고는 했다. 눈가에 있는 잔주름이 내게는 너무나 예뻐 보였지만, 선생님은 주름이 있다는 말을 싫어했다.


딴. 딴. 따다다단...


쇼팽이 음악실을 가득 채우면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다가,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바라보게 되었다가,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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