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라, '바우어의 정원'
1.
올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강보라 작가의 <바우어의 정원>이다.
주인공 은화는 '애매하게 늙은 여자 배우'다. 세 번의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자연스레 커리어의 공백이 생겼고,빠르게 재기하려면 어떤 작품이든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연극 오디션을 보러 간다.
남편 무재와는 평범한 대화와 예측가능한 일상을 보낸다. 다만, 은화는 무재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있다. 무재가 커리어를 포기하고 고정적인 수입을 벌어오는 덕분에 은화가 배우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 뱃속의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 점, 유산의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위를 원인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재와 은화는 사랑하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을 보이지 못한다. 그들은 애써 말에 무게를 얹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를 향한 위로의 마음이 닿지 못하고, 쌓이지 못하고, 겉돈다. 함께 있지만 외로워 보인다 둘은.
오디션을 보기 위해 간 곳에서 은화는 정림을 만난다. 무명 시절, 아르바이트로 내담자의 내면 치유를 돕는 치유 워크숍의 보조자아 역할을 맡았었다. 그때 정림은 내담자의 입장에서 은화와 짝을 이뤄 연기했다.
마침 오디션을 보려는 연극 또한 무명시절의 워크숍을 떠올리게 하는, '배우가 여성으로서 겪은 실제 경험 말하기'라는 독특한 컨셉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 세월 동안 유산이라는 공통된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심사 위원 앞에서 두 사람이 선보인 연기는 같은 사건이다.
은화는 자신의 아픔을 연출했다, 새틴바우어처럼.
새틴바우어는 암컷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란색의 물건을 강박적으로 수집해 자신만의 정원을 꾸미고 구애한다.
은화는 심사위원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늘어놓았고, 자신이 합격할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정림을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은화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감각들을 정림의 오디션 소감 앞에서 투명하게 떠올리게 된다.
참, 그 연출가 여자 말이에요. 마지막에 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제가 겪은 건 유산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출산이라고, 자기가 유학한 프랑스에서는 다들 그렇게 표현한다고요. 제가 어리둥절해하니까 웃으면서 어개를 으쓱하고 마는데, 오디션 끝나고 그 몸짓이 계속 떠오르는 거에요. 모르겠어요. 왜 뒤늦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자꾸 뭔가를 헐값에 팔아넘긴 기분이 드는 건지
심사위원은 막달에 사산한 정림의 경험을 무딘 칼로 상처를 찌르듯 일반화 했다.
정림이 '커리어 때문에 마냥 임신을 기뻐하지만은 못했고,
유산 뒤에 이제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역겨워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는 이야기를 한 다음이었다.
은화는 상담극의 형식을 빌려 정림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화가 나. 그 여자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나?"
정림이 답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그 뒤에 한동안 이어지는 두 사람의 주고받기는 한 편의 연극 같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보조자아가 되어 '녹아내리는 눈이 되고, 얼어붙은 고양이가 되고, 날려가는 비닐봉지'의 기분이 된다.
듣는 사람이 있지만 각자의 고백 같고,
혼잣말 같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동안 고통에 애써 둔감했던 은화가 정림 때문에 화를 낸다.
소설은 유산의 고통을 학창 시절 따돌림의 기억과 연결시키는데,
은화는 학창 시절 자신의 책상에 구더기가 끓는 우유를 쑤셔넣던 아이들에게 화내지 못하고, 그 우유를 보란듯이 마셔서 엉뚱하게 스스로를 괴롭혔던 적이 있다. 그때 마신 상한 우유의 벌레가 몸 속에 돌아다니며 아이를 유산한 걸까, 기억은 죄책감으로 연결되곤 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이 너를 통과해 재현되는 순간, 더 이상 무감할 수 없다.
정림을 위해 자신의 화를 고백한 은화는 '살아난 손의 감각'(80쪽)과 더불어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 먹는다.
오디션의 무대에서 자신의 삶을 연출하며 진짜 고통과 감정은 스스로 소외시켰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오디션 합격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지만, 거절할 것이라 다짐한다. 대신, 무재가 부탁한 일_자신처럼 따돌림을 받아 힘들어한다는 여학생 초원을 만나는 일_을 하기로 한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도 아직 알 수 없는 채'(81쪽)라고 하지만, 아마도 말하기보다 들을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이란 마법의 조각으로 정원을 완성하는 새틴 바우어가 될 것이다.
2.
자신을 위해 화내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내 감정은 화가 나는 걸까?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이 맞는가? 화가 나는 게 정상인가?'
자신의 괴로움을 모른 척 하기 위해 묻지 않아도 될 말을 자꾸만 묻는 사람들은
대체로 약자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소홀해도 다른 사람을 위해 화낼 수 있어서 존엄한 존재들이다.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 앞의 키세스 군상이 생각난다.
계엄령, 그게 왜? 직접적으로 피해 본 것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 일이 아닌 것은 없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는 화가 났고 고통스런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우리에게 똑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서 완벽하게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너를 위로하는 일이 곧 나를 위로하는 일임을 알고 있다.
강보라의 소설을 읽고 나니,
소설을 읽는다는 건, 작고 파란 불씨를 저마다의 정원 속에 하나씩 심는 일인 것 같다.
독자로 하여금 세상의 고통을 수집품처럼 모아 감각의 정원을 꾸미는 새틴 바우어가 되게 하는 일이 바로 소설을 읽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