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는청소년 유해도서, 혹은 금지 논란을 꼬리표처럼 달고 팔려나갔는데, 읽은 뒤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읽긴 했는데, 잘 읽히긴 한데... 역시 충격적이야.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읽기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특히 미성년을 대상으로 할 때 '권하는' 말은 하기 어렵다.노벨상 수상이라는 책의 이력이 사람들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작가를 비난하지도 못한다.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음'은 독해와 감상의 문제가 아니라수용의 문제다.
'채식주의자'는 영혜라는 인물을 주변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주며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영혜의 남편, 2부는 영혜 언니의 남편, 3부는 영혜의 언니(인혜)가 서술한다. 독자들이 가장 많은 불편을 느끼는 부분은 아무래도 영혜 형부의 시선으로 서술하는 2부다.
형부란 사람은 예술한답시고 처제를 꼬셔 자기의 성적 욕망을 채우고, 처제(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윤리적 규범까지망각해 간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꼭 이러한 전개여야만 했는지 독자 입장에서 의문스러울 수밖에없다.
1.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꼭 이러한 전개여야만 했을까?'는
생각과 감정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채식주의자'를 읽는 일에청소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의 우려가 특히 컸는데, 이 책이 아이들이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은 근거가 분명한 생각인가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다른 표현인가.
만약 감정의 문제라면, 나의 불편한 감정이 타인으로 하여금 읽지 말아야 할 근거로 적절한지 숙고할 일이다.
2. 불편한 감정 직면하기
영혜와 형부는 닮았다.
둘 다자기안의 욕망 때문에 괴롭다는 점에서 그렇다.
매일 꾸는 꿈 때문에 채식을 고집하던 영혜는 형부와 관계 맺은 이후 자신을 괴롭힌 것이 꿈에서 본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었음을 깨닫는다.
자기 안에 이미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적 욕망과 잔인성이 내재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먹지 않고 살 수 없기에 완전히 무해한 존재로 사는 일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영혜는 그 불가능을 꿈꾼다.
그래서 괴롭다. 죽고 싶다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영혜의 주변인들은 영혜의 '육식 거부'에 초점을 맞추고 해결하려 든다. 한 번도 존재의 무해함을 상상해 보거나 꿈꿔보지 않았을뿐더러 고기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영혜는 비정상이다.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는 어떤가.
그는 아내인 인혜가 인정할 정도로 예술에는 진심이다.
그의 열정 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나무 불꽃, 194쪽)
예술은 주체의 욕망을 바탕으로 실현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영혜는 존재 자체로 그의 욕망이자 예술이다.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할, 야생의 표식 같은 흔적이 영혜에게 있다. 몽고반점을 지닌 영혜는 그에게 이미 실현된 예술이므로 그것을 가져야 자신의 욕망이 실현된다.
문제는 영혜가 아내의 동생이라는 것인데
자기 안의 괴물 같은 욕망을 알기 때문에 그 또한 죽음을 떠올린다.
죽었으면 좋겠어.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죽어버려 (몽고반점, 159쪽)
3. 독자인 당신은 윤리적 경계를 벗어난 감정과 욕망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가?
채식과 예술로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 독자인 당신은 윤리적 경계를 벗어난 감정이나 욕망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지 묻고 싶다.
경계를 벗어난 욕망에 대해, 그것이 가져올 파괴적인 힘에 대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상상을 실재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얻게 되는 진실이지 않은가.
우리 역시 영혜의 주변인들처럼 두려운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금기를 금기로 여기지 않는 어른이 될까 봐,
실은 나도 느꼈던 그 추악한 감정을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더 이상내가 좋은 어른(부모)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봐.
소설 속 그나마 평범해 보였던 인혜조차 제 안의 금기-아이를 버리고 도망갈 생각-를 발견하고 놀라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는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한강은 몹시 섬세하고 영리한 작가인데,
독자가 '불편함'을 이유로 영혜의 이야기를 멀리하려는 모습이 영혜의 부모와도 닮은 데가 있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일련의 사태는 아버지로 하여금 가부장적 권력에의 욕망을 자극했다.자신의 말 한마디, 우악스런 힘으로 평정되곤 했던 집의 평화가 또 다른 가부장(영혜의 남편)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 데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내가 면목이 없네",44쪽)
엄마는 남편과 사위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 되게 하는 딸이 두렵고 밉다. 엄마가 살아온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가부장의 질서 안에서 생존은 가부장의 편에 서는 일과 같은 일이었다.("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71쪽
그래서 작은딸 영혜가 남편에게 18살이 되도록 매를 맞아도, 큰딸 인혜가 눈치 보며 술상을 차려도 방관했다. 손목까지 그으며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기어코 흑염소 달인 약을 지어온 것은 영혜를 가부장적 질서 안으로 들어앉히고야 말겠다는, 두려움이 밀어 올린 욕망 때문이다.
영혜의 부모는 나중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딸을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고 좌절시키는 영혜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여러분이 느낀 불편함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감정인가.
나로 말하자면,
읽을수록 크게 불편한 장면은 오히려 1부와 3부였다.
역시,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형부와 처제의 사랑(혹은 성적 관계 맺음)은 일반적이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그러한 설정을 가져왔다면 분명 작가의 의도가 있는 것이니,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된다.
그러나 영혜의 남편이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가치관의 폭력에 나는 무감했다. 처음 읽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남편의 시선에 따라 영혜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으로만 여겼다. 재독과 누군가 쓴 통찰력 있는 글 덕분에 겨우 알아챌 수 있었지만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나 역시 남편과 같은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폭력적인 생각과 언어로 가까운 이들을 대했던 건 아닐까.
가장 큰 두려움은
나중에 내 아이들이 이 책을 볼 때,
관계의 수평선이 찌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 관계성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은 내 감정일 뿐,
이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와 별개다.
세상에 무해한 사람으로서 타인과 성숙한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은 나의 욕망이다.
만약 나의 욕망이 좌절될까 두려운 마음에 아이들에게 소설을 권하지 않는다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마주할 기회를 뺏는 셈이 아닐까.
자기 욕망의 크고 작음, 결핍과 과잉, 경계의 상상, 검열과 통제등 그 모든 내적 행위가 소설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