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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스타 Sep 16. 2020

나는 오늘도 프러포즈 반지를 낀다

D-278, 남이 아닌 "우리"가 행복한 결혼이 되기를 바라며 

28살의 생일 하루 전날, 남자친구는 뜬금없이 자신의 축구 경기를 보러 오라고 했다.

평소 친구들과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나에게 종종 응원 오라고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워낙 낯선 사람들 만나는 자리를 어려워하기도 하고 홀로 스탠드에 앉아 응원하는 게 얼마나 뻘쭘할지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에 몇 번을 거절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이번만큼은 정말 단호하게 꼭 와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툴툴거리면서 축구장에 갔다.


경기 한 판을 마치고 쉬는 시간.

남자친구와 빈 경기장에서 공을 주고받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장미꽃을 든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친구들에게 한 송이씩 장미꽃을 받고, 남자친구의 편지와 꽃다발을 받고.

그리고 반지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순간 뒷걸음질 칠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고마움과 설렘으로 바뀌었다.

축구장에서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싶어 뭔가 뿌듯하기도 했고,

땀 뻘뻘 나는 경기 뒤에 프러포즈를 해버려서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하는 남자친구가 귀엽고 웃기기도 했고,

비가 오면 나에게 우산 씌워줄 담당까지 다 정해놨다는 든든한 남자친구의 친구들에게도 고마웠다.


예물, 예단, 폐백 등 우리의 기준에서 형식적인 것은 최소화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프러포즈만큼은 해주고 싶었다며 종로 금은방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알아보고 준비했다는 남자친구가 고맙고 마음이 찡했다.


몇 주 뒤 반지 사이즈를 조절하고 다시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반지를 보며, 결혼 준비하는 실감이 나기도 하고 프러포즈받던 때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또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반짝거리는데, 끼고 다녀도 되나? 사람들이 결혼하냐고 막 물어보면 어떡하지?'




이때까지 나는 회사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결혼할 예정이라고 딱히 알리지 않았다.

아직 결혼식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남들의 평가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종종 "아직은 결혼 생각 없지? 너무 어리잖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도 않고 어른스럽지도 않아서 결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말로 들렸다.

직장 선배들에게 "강남에 집 한 채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라며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그렇게 못하고 내 남자친구도 그렇게 못하는데 그럼 우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로 들렸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인데 여자친구가 원하는 건 최대한 다 해주고 싶다"라는 직장 동료의 말,

"결혼을 언제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하고 싶은 걸 다 할 만큼 넉넉하지 못하고 남들 하는 만큼 다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데도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의 신혼집이, 내가 입을 드레스가, 내가 결혼할 웨딩홀이 충분히 괜찮을까.

내가 한 선택이 적어도 "남들 하는 만큼"은 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준비하는 결혼이 행복해 보이고 괜찮아 보일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너무 의식하다 보니 결혼 소식을 전하는 것조차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너무 반짝거려서 예사롭지 않은 프러포즈 반지를 끼면 사람들이 나의 결혼을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반지를 끼고 출근한 첫날.

점심시간 같이 식사한 동료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 반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동료의 반응은 내 걱정처럼 나의 결혼이 얼마나 괜찮은지에 대한 탐문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 어린 축하였다.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사실 더 비싸고 좋은 거로 할 수도 있는데, 화려하거나 번잡한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이거로 고른 거예요."

"남들이랑 똑같이 하면 너무 재미없으니까, 굳이 그건 안 했어요."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 흠 잡히거나 무시당하지 않도록,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상황을 더 멋지고 비싸고 괜찮아 보이는 것처럼 포장할 수 있도록 애써 변명을 찾았다.


나는 왜 그렇게 불필요한 변명을 고민했을까.

"남의 일을 평가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비교의식에 갇힌" 나 때문이었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기준을 따라 선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건데,

내 주변 사람들이 어디에 집을 구하고, 어느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고, 어떤 신혼여행을 가는지 신경 쓰고 있었다.

혹시나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좀 짠하고 불쌍해 보일까 봐 걱정했고,

"이렇게 멋지게 결혼하다니 너무 행복하겠다"라는 인정과 부러움을 받고 싶었다.


내 안의 비교의식 때문에,

프러포즈 반지에는 남자친구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 그리고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행복한지보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가 더 중요하고,

남들이 보기에 부족함 없이 준비된 결혼보다 우리가 서로를 깊이 알고 진심으로 사랑할 준비가 된 결혼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프러포즈 반지를 꺼내본다.


남들의 말과 시선에 흔들리지 않기로 결단하는 마음,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소망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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