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들이여
"잘 지내? 나 기억나요?"
얼마 전, 전 여자친구가 아닌 전 단골손님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오래전 십분의일에 자주 오시던 S대 S 교수님이었다. 건축을 가르치는 그분은 그 누구의 지인도 아닌 정말 그냥 손님이었는데 우연히 한 번 오시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자주 바에 왔다. 평일엔 혼자 일하던 시기였기에 내가 바쁘면 주방에 들어와 아직 물기도 가시지 않은 와인잔을 툭툭 털며 직접 가져가던 그런 사람이었다. 전 여자친구보다 설레.. 가 아니고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취기도는 목소리로 내 근황을 물은 그는 나에게 우리 잊어버리지 말고 살자!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를 잊은 적 없다. 교수님 연구실로 십분의일 책도 한 권 보냈었던 걸요... 우편을 잘 열어보지 않으니 이메일로 전자책을 보내달라는 여전히 쿨한 그의 요청에 대학 홈페이지를 뒤져 그의 이메일 찾았다.
책을 보내고 그를 추억하다 보니 옛 단골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렇게 재밌고 이상한 단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그들은 주기적으로 찾던 와인 바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됐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이런 시끌벅적한 술집은 잘 가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더 이상 술 자체를 예전처럼 마시지 않게 되었을 수도. 반대로 을지로엔 정말 많은 술집들이 생겼기 때문에 새로 생긴 곳을 찾아다니는 재미를 들였을 수도 있다.
사실 무의미한 추측들이다. 내 경우에 비춰서 생각해 보면 간단해진다. 나는 한때 자주 가던 그 카페에 왜 이제 가지 않는가? 최근 그 동네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하루에 한잔은 소비하며 단골로서 애정을 더 붙일 가능성이 큰 카페도 간단한 이유로 쉽게 발길을 끊게 되는데 그에 비해 찾는 빈도가 덜한 와인 바깥은 술집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되는 이유는 훨씬 더 단순하고 다양할 것이다. 단골들은 그냥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행여나 한때 내 단골 가게였던 충무로 에스프레소 사장님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지 않으시길 바란다.
예전에 어떤 도시계획 전문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지리적 면에서 상권은 크게 도심상권과 지역상권으로 구분된다 (용어는 다를 수도 있다) 가령 십분의일이 있는 을지로, 종로, 명동 일대는 전형적인 도심상권이다. 주거는 거의 없고 회사가 많다. 유동인구도 많은 편이다. 이런 곳에 위치한 가게의 손님들은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다. 근처 직장인, 다른 동네나 지역에서 놀러 온 사람들, 외국인이 있을 수 있고.
서울에서 돈암동(성신여대), 문래동 같은 곳은 지역상권에 속한다. 상대적으로 회사는 적고 주거가 많다. 외부에서 오는 사람은 적지만 상대적으로 단골을 많이 만들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상권을 확장하는 것은 불리하다. 책에서 본 내용은 상권보다는 도시의 특성을 설명하는 내용이었지만 보면서 자연스레 을지로와 문래동이 생각났다. 두 지역은 비슷한 시기에 떴다. 하지만 을지로가 힙지로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서울 신흥 상권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문래동 창작촌은 뜨기는 했지만 그 파급이 약했다.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리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10년 전 십분의일을 만들 때 을지로보다 먼저 알아본 곳이 문래동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을지로 같은 지역에서 단골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곳은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곳. 사람들의 면면도 계속 바뀐다. 단골들이 다 어디로 갔지? 의문을 품을 일이 아닌, 단골들이 있었다니 대단하다...라고 감사할 일인 것이다. 전화까지 주신 S 교수님, 젊은 애들끼리 합심해 만든 이곳을 응원하고 싶다며 광장시장에서 걸어온 D증권 부장님.. 올 때마다 나에게 부동산 구매를 권했던 어느 통신사 과장님.. 여자 손님에 비해 이런 아저씨 손님들은 수적으로 훨씬 귀하기 때문에 내가 유독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여전히 비슷하게 잘 살고 있듯 그들도 어디에선가 건재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