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탄생부터 내꺼였다
지난주 종이 이야기에 이어서…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종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수북하진 않았고 벽에 붙여두지도 않았지만 몇몇 임팩트 있는 낙서와 글귀들을 두어 장씩 붙어두곤 했다.
어떤 단골손님이 있었다. 3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남성분. 3-4번쯤 왔을까. 이름까진 모르지만 얼굴은 선명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금 더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 바쁘지 않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작은 안주 하나정도는 서비스로 내어주고 싶은 사람. 그 정도의 마음이 가는 분들을 그 당시의 나는 단골이라 칭했다.
펜과 종이를 가져가 쓰는 분은 아니었는데, 그날은 무슨 바람인지 거의 마감 시간까지 일행과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자리에 두고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처럼 특별한 얘기 없이 잘 마셨다, 오늘도 감사했다 등의 정중한 말들과 함께 절에 있는 스님이 지을법한 온화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윤아야 사랑한다
너의 탄생부터 내꺼였다
손바닥 만한 종이 하나에 꽉 채운 두 줄. 그가 남기고 간 건 이게 전부였다. 두꺼운 매직도 아닌 볼펜으로 대충 썼지만 취한 와중에 한 글자씩 눌러쓴 것이었을지 어째 눈에 잘 들어왔다. 어떤 사랑이면 탄생부터 내꺼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좀처럼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 탓인지, 남이 하는 사랑 표현은 오글거리기보다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어떤 글은 말보다 힘이 세다. 그가 남기고 간 두 문장이 참 단단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벽에 붙이고 붙여만 두기는 아쉬워 슬그머니 인스타에도 올렸다. 생각보다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다. 여자친구인가? 과하다, 어쩐다, 그래서 도대체 윤아가 누구냐. 임윤아인가? 오타쿠 같은데..? (2017년이었고 당시까지는 아직 윤아 하면 자연스레 소녀시대 임윤아가 대세였던 것 같다. 아마도…) 댓글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궁금해졌다. 그러게 윤아는 누구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게시물에 댓글 하나가 달렸다.
이거 딸이름이라. 박윤아라네요 ㅋㅋ
반전 그리고 작은 탄식. 단 한 번도 대상이 딸일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딸이었구나. 탄생부터 사랑할 수 있는 존재. 늦은 밤 와인을 마시다 자신의 어린 딸을 떠올리는 마음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가 두고 간 종이는 한동안 십분의일 벽에 붙어있었다. 떨어지면 다시 붙이고는 했었는데 언제 떨어졌는지 어디 종이더미 속에 들어가 버렸는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부디 윤아는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