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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부적

바를 운영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신다면

by 모과

십분의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아무래도 포스에 찍혀있는 매출을 들여다볼 때 일까. 운영을 하는 사람으로서 매출이 잘 나오면 당연히 기분이 좋다. 하지만 거기서 오는 기쁨은 잠깐이다. 그걸 즐거움이라고 하기도 뭐 하고 가장 즐거운 순간으로 꼽기엔 어째 찜찜하다. 바를 운영하는 것이 오로지 생계만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즐거움의 순위를 매겨본 적은 없지만 은은하게 오래가는 즐거움을 하나 꼽자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매장에 남겨진 손님들의 메모를 볼 때다.


1층 박사장님이 주고 간 메모지가 다 떨어진 뒤에도 십분의일 큰 테이블엔 늘 펜과 메모지를 올려두고 있다. 안내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메모지가 있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어떤 사람들은 주문을 하기도 전부터 쪼르르 테이블로 와서 펜과 종이를 하나씩 챙긴다. 남겨지는 메모는 정말 각양각색. 누구누구 다녀감! 포스트잇을 붙이게 하는 오래된 식당에 가면 꼭 볼 수 있는 다녀감 인증 메모부터 어디서 가져온 글인지 멋진 글귀를 남기는 사람, 술에 취했던 것인지 알아볼 수 없게 쓰인 낙서들.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둔 이후부터는 그림도 많아졌다. 가끔은 나라면 이런 그림은 두지 않고 집에 가져가고 싶었을 것 같은데... 싶을 정도로 잘 그린 그림도 남겨진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 정말 많다!

이런 메모들은 주로 혼자 있을 때 본다. 영업 중에는 볼 정신도 없거니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마감 이후 손님들이 모두 가고 난 뒤, 아니면 어쩌다 낮시간에 나왔을 때 한 번씩 쌓여있는 종이들을 뒤적거린다. 손님들이 직접 벽에 붙여두게 하진 않고 중앙 큰 테이블에 올려두게 하고 있어 재밌는 메모를 보려면 어디 중고 엽서가게라도 간 사람처럼 종이 더미를 뒤져야 한다. 어떤 종이는 걸러내기도 한다. 단순 욕설이라든가, 여친 급구 000-0000-0000, 빙고를 하고 간 사람도 꽤 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그림이나 글귀, 그리고 십분의일에 대한 일종의... 찬양? 아 후기라고 하는 게 좋겠다. 이런 것들은 뽑아내어 벽에 붙인다. 무엇이 무엇이 맛있고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참 정성껏 이런 걸 남긴다. 메뉴 그림까지 그려가며 남겨진 후기는 당연히 흐뭇할 수밖에 없다. 벽에 붙여놓고 다 같이 보고 싶다.


안 붙여 놓을수가 없는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이야기다. 각자의 이야기 또는 십분의일에 대한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그냥 후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남긴다. 그런 건 붙여두고 여러 번 읽는다. 어떤 커플은 이곳에서 소개팅을 하고 처음 만났었는지, 한참 뒤 찾아와 메모를 남기고 갔다. 다음은 그중 여자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한 장.


여기서 처음 사랑하는 (진정으로) 사람을 만났어요.
진실한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에게 편지를 짧지만
써줬고 주고받고 와인 한잔씩 주고받으며 마음도
주고 받았지요. (중략)
여기 오는 예쁜 마음의 연인들도 예쁘게 주고받고
그 사랑이 이뤄지길 바래요.


직접 받은 건 아니지만 한 테이블에 두 장의 종이가 나란히 놓여있어 커플이 써두고 간 것으로 추정했다. 대단히 잘 쓴 것도 아니고 낯간지러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진정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힘이 세다. 당시에 더 기분 좋았던 것은 종이를 발견하기 직전에 봤던 블로그 후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래 되서 가물하지만, 여기서 소개팅을 했는데 벌써 몇 년이 지났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글. 혹시 이들이 그들이려나? 상상하며 혼자 설랬던 게 떠오른다.


와인도 음식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이 있진 않은 이곳을 특별하고 재밌는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 이런 다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른 연인들의 사랑을 기원했던 저 손님의 메모처럼 멋진 이야기와 그림들이 십분의일 벽에 붙어있다. 그렇게 마치 부적처럼, 이곳을 수년 째 지탱해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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