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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Feb 13. 2021

위태롭기에 도전적인 균형 잡기


물구나무서기 자세는 이른바 '균형 자세'다. 우리 몸에는 두 발, 무릎, 엉덩이와 같이 무게를 지탱하는 것에 익숙한 부분들도 있지만, 손, 팔, 머리, 어깨와 같이 평소에는 바닥을 지지하는데 거의 사용하지 않는 부위들도 있다. 이런 부분들로 바닥을 지지하며 몸을 띄워 올리는 자세들을 요가 안내서 같은 책들에서 '균형 자세'라고 일컫는 것을 종종 본다. 즉, 일상의 맥락에서는 거의 (어쩌면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까다로운 균형 잡기를 부러 연습하는 것이다. 물구나무서기 자세들 말고도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유지하는 나무 자세(Vrkshasana), 전사 자세 III(Virabhadrasana III), 까마귀 자세(Bakhasana) 등도 균형 자세의 일종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비일상적이고 어려운 균형은 아니라고 해도 균형 감각을 필요로 하는 자세는 굉장히 많다. 어쩌면 눕거나 엎드리는 것처럼 바닥에 딱 붙어 있지 않고 어떻게든 지면으로부터 몸을 띄우는 거의 모든 자세들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앉기, 서기, 네 발로 서기 등 우리가 자주 취하는 자세들은 익숙하기에 더 이상 우리가 균형을 잡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느껴지지 않을 뿐, 사실 안에서는 어느 정도 자동화된 균형 시스템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앉거나 선 자세에서 머리 위에 종이컵 같이 너무 무겁지 않은 물건을 올려놓아 보면 무의식화되어 있던 나의 균형 시스템의 작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드러나게 된다. 이는 종이컵을 올려놓아서 몸이 갑자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컵의 존재로 인해 내 몸의 흔들림이 더 잘 드러나는 것뿐이다. 네 발로 기어가는 자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등 위에 너무 무겁지 않은 물건을 올려놓으면 갑자기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숨을 참고 몸에 힘을 빡 주는 식으로 몸의 흔들림을 억제하면 결국 더 빨리 물건을 떨어뜨리게 된다. 우리 몸은 애초에 균형을 잡기 위해 계속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흔들림을 억제하면 아예 더 크게 균형을 잃기 때문이다.


어떤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 균형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우리가 중력장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고 둘째, 우리가 바닥에 붙어 생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태어난 우리는 일생을 특정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의 작용 안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그 힘에 내 몸을 온전히 맡겨 바닥으로 수렴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힘으로부터 몸을 띄워 올려야 하고, 그렇게 띄운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성인들은 예전에 이런 '익숙한' 자세들도 하나하나 배워야만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비록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갔을 만큼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갓난아기는 일어서거나 걷는 것은 고사하고 자시느이 머리 조차 가누지를 못한다.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었다는 석가모니는 예외다.) 즉, 중력을 거슬러 머리조차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고, 몸을 뒤집을 수 있게 되고, 배를 밀어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앉을 수 있게 되고, 네 발로 서서 기어 다닐 수 있게 되고, 설 수 있게 되고, 종국에는 걷고 뛸 수도 있게 된다.


여기서 계속 "~있게 되고"라며 수동형의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이와 같은 발달의 과정이 인간의 DNA가 지시하는 강한 추동력을 받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대부분의 아기들은 (물론 장애가 있는 경우도 그렇고, 석가모니와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석가모니와 같은 남다른 의지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어도 생후 13개월을 전후한 시기까지 이러한 발달의 과정을 거쳐 서고 걷는데 이른다. 하지만, 이런 발달의 과정이 유전 정보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유전자가 우리의 근육과 골격이 어떻게 발달할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아기들이 실질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이와 같은 성장과 발달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아기들이 이런 운동을 하는 것조차도 유전자의 강한 드라이브를 받아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의지에 따른 것이건 반사적인 운동이건 간에 아기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실질적인 운동은 신체의 기능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른 물리적이고 구조적인 신체 성장을 이끌어 낸다. 가령, 머리를 들어 올리려는 아기들의 끈질긴 시도는 경추에 앞을 향한 전만 굴곡을 만들어내고, 목의 앞과 뒤에 머리를 가눌 수 있도록 조절하는 많은 근육들을 발달시킨다.


물론 우리 유전자 안에 두 손으로 균형을 잡고 서기 위한 신체의 구조적, 기능적 발달을 도와주는 유전자는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두 손과 팔은 더 넓은 범위를 자유롭게 움직이고, 더 세밀하고 정교한 움직임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다시 말해, 손이나 팔 등 상체의 부위들은 무게를 지탱하거나, 몸을 지면으로부터 들어 올려주는 기능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균형을 배우기를 즐기고, 더 높고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지향하는 성향은 여전히 우리의 유전자 안에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본능이 없었다면, 과연 인류가 척추동물들 중에서는 직립 보행이라는 가장 위태로운 균형을 일상화한 동물로 진화해 올 수 있었을까? 그로써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서 더 멀리 내다보며, 두 손과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두뇌를 폭발적으로 발달시킨 지금과 같은 종이 될 수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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