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범 Jun 06. 2021

불면의 밤을 날아서

오는 잠을 향해 몸과 마음을 열기

어제저녁, 두통이 찾아왔다.

오전에는 온라인 마케팅 전략에 대한 동영상 강의를 보고, 요가 수련을 했다.

오후에는 얼마 전 작업 과정에 참여했던 공연을 본 후, 함께 한 사람들과 간단히 식사도 했다.

마음을 담은 선물과 서로 웃는 얼굴과 맛난 음식을 나눈 시간이었다.

두통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날이었다.


급작스레 찾아온 두통은 밤이 되어도 가시질 않았다.

두통을 없애기 위해 빨리 잠에 들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두통 완화에 좋은 셀프 핸즈-온*을 했다.

눈 주위를 감싸는 두개골과 안면골을 감각하고 안구 움직임으로 후두하근의 긴장을 풀었다.

두통이 있어도 나의 머리와 얼굴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긴장이 완화되었다.


스르르 밀려오는 잠을 환영하기 위해 황급히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코앞까지 온 잠을 두 팔 벌려 끌어안으려는 순간, 꿈 깨!

발끝부터 서늘해지며 온 몸이 쭈뼛 서서 결국은 수면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돌아온다.

아득하지만 익숙한 불면의 감각.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불면증으로 꽤나 고생을 했다.

아침 6시면 쩌렁쩌렁한 기상 음악이 울려 퍼지고, 7시에 0교시가 시작되는 학교였다.

식사 시간을 빼고는 변변히 쉬는 시간도 없이 밤 12시까지 자습을 했고, 독서실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은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등짝 스매싱을 당하곤 했다.

더 무서운 것은 밤 1시 정도부터는 무조건 소등을 하고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기는커녕 불 켜고 책을 볼 수도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또르륵 또르륵 내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무기력했다. 성적도 내 맘대로 안되는데 이제는 잠도 못 자나 싶었다.

밤에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잤어도 수업 시간이나 자습 시간에는 절대로 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잘 때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먼저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낮에 공부를 하려면 잘 수 있는 밤에는 자야 하는데 잘 수가 없으니 속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야 하는데... 자야만 하는데...


대입 이후 그렇게 오랜 기간 불면증으로 고생한 적은 없지만, 누구나 그렇듯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나에게도 종종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타이르곤 했다.

지금 못 자도 괜찮아. 내일이라도 졸릴 때 자면 되는 거야. 죽지 않아.


아니면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엄마를 닮은 나는 누워서 책을 폈다 하면 몇 줄 못 읽고 잠들곤 했다.

엄마는 몇 년간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베개로 쓰시다 결국 책장에 꽂아 버리셨다.


요가와 소매틱스를 배우면서 잠을 청하는 방법이 더 다양하고 정교해졌다.

마음의 스트레스나 긴장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몸의 긴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잠을 자기 위해 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면,

이제는 몸의 긴장을 풀어 지친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만들어주는 방법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머리, 목, 얼굴의 긴장을 풀어주는 셀프 핸즈-온이다.

지난밤처럼 두통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특히 잘 먹히는 방식이었다.


셀프 핸즈-온도 할 만큼 했는데 쉬이 잠들 수 없자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이유를 모른 채 시작된 두통이라 더 이상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 지도 막막했다.

어떤 불안, 메스꺼움, 울렁거리는 마음.

문득 애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소리로나마 그의 존재를 느끼면 이 메스꺼움이 조금은 진정될 것 같았다.


따뜻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불안해요. 내가 잘 못할까 봐. 갑자기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이유 없는 두통이라고 치부했지만, 한 꺼풀 벗겨냈을 뿐인데 외면하고 있던 내 마음을 쏟아 놓고 있었다.

최근 조그마하게 운동 지도 서비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고 있던 불안과 고민거리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속사정을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남아 있던 두통이 거의 잦아들고 마음도 가벼워졌다.

내 몸과 내 맘이지만 참... 신기하다.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 신경 세포 차원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에너지 교환이라고 생각해요.

참으려고 하면 참을 수는 있지만, 참는다고 해서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소화하거나, 소리를 질러서 소진하거나, 운동이라도 해서 승화를 시키거나...

어떻게든 물리적인 차원의 무엇으로 바꾸지 않고 버티면, 당장 튀어나오진 않아도 그냥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지. 에너지 보존 법칙에 위배되잖아요.

그런데 이걸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안전하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통화 중에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대화의 맥락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돌아보니 사실 누구보다도 어제의 나에 대한 이야기 같다.

불안한 상황에서는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진다.

감정은 외면당하면 당할수록 다른 형태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알아차려달라고 말이다.

그럴 때는 직면해 줘야지 별 수 있나.

다만 위기의 순간에도 응어리진 이 감정들을 "안전하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또다시 찾아오는 불면의 밤마다 이런 방식과 지혜를 배워 가기를...




*알렉산더 테크닉에서 손을 이용해서 감각 인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핸즈-온(hands-on)이라고 부릅니다. 셀프 핸즈-온은 자신의 손을 사용하여 스스로 도움을 주고받는 핸즈-온입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pexels.com/ko-kr/@alexfu

작가의 이전글 호흡은 왜, 잘하려고 할수록 답답해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