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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Jun 08. 2021

카페인 배출 시간은 벌써 지났다지만...

오는 잠을 향해 몸과 마음을 열기

나는 카페인에 매우 민감한 몸을 타고났다.

엄마는 인스턴트커피 한 잔에도 밤 잠을 설치시고, 나도 본바탕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한 동안 꾸준히 커피를 마셔 버릇했기에 낮에 커피를 한 잔 하고, 새벽 1~2시 즈음 잠드는 사이클을 특별히 피곤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한 번은 평소 먹던 것보다 높은 함량의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고서 새벽 4시에 겨우 잠든 적이 있다. 

다음날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잠을 설친 게 카페인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심리적인 요인이 아니겠냐 했다. 카페인은 불과 몇 시간이면 배출된다는데, 아무리 민감한 체질이라도 오전 10시에 마신 커피 한 잔이 12시간도 넘게 영향을 미치겠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손 발이 차갑고 몸이 뻣뻣한 게 잠이 잘 오지 않던걸...?


살짝 민망해져서 이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그때는 친구도 나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개인마다 카페인에 대한 민감도 뿐 아니라 배출 시간도 다르다는 것. 커피 한 잔에 들어있는 카페인이 배출되는데 사람에 따라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12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카페인에 민감할 경우 배출이 더 오래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10시부터 새벽 4시면 무려 18시간이다. 이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카페인 효과가 지속되다니...?

내가 봐도 이건 좀 심하다. 엄살 피우는 마음이 기억을 왜곡시켰나? 친구 말대로 심리적인 불안 때문이었을까?


최근에 카페인이 내 몸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몇 시간 못 잔 상태로 오전 일찍부터 요가 개인 레슨을 하고 알렉산더 테크닉 교육을 받으러 간 날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자 식곤증까지 더해져 피로감이 몰려왔다.

알렉산더 테크닉과 같은 소매틱스 계열에서는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섬세하게 감각하는 활동을 주로 한다. 그만큼 정적인 활동이 많고,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런 활동을 하다 보면 졸음이 온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이대로 오후 수업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잘 것 같았다.


주저 없이 카페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수업에 들어갔다. 설마 하니 내가 커피 마신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잠들 리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렸다. 아니 졸았다.

쿨쿨 잠든 것은 아니었지만 깜빡깜빡 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잠이 너무 부족한 날에는 커피를 마셔도 피곤함을 느꼈지만, 보통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피곤한데 잘 수도 없는 좀비 같은 상태가 되곤 했는데 말이다. 방금 한 활동이 이런 나도 잠들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인은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을 활성화시킨다. 그리고 교감 신경이 항진되면 우리 몸은 투쟁 도피 반응을 보인다.

생존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맞서 싸우거나 도망칠 수 있는 모드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도망가거나 싸우기 위해서는 강하고 빠르게 수축하는 근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신의 근긴장도가 높아진다. 혈관도 수축하면서 혈압이 올라가 혈액 순환이 저해되기 때문에 심장의 펌프질은 더욱 거세어진다. 또한 얕고 빠른 호흡을 하게 되는데, 이런 작용은 호흡근들의 긴장도를 높이고 호흡이 답답하게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페인으로 인해 긴장한 우리 몸은 카페인이 배출되면서 저절로 이완될까? 어느 정도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겠지만, 근육이나 혈관 차원의 물리적인 반응은 신경계의 전기적 작용보다 훨씬 느리게 일어날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긴장된 상태를 오랜 시간 유지했다면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되찾아지고 긴장이 풀리는 데는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문득 위에서 얘기한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커피를 마시고서 18시간이 지나도록 잠에 들기 어려웠던 나. 친구의 말대로 심리적인 요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호되게 고생한 이후로는 불면의 밤에도 그다지 불안해하지는 않게 된 나였다.불안 때문만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나의 몸과 냉골 같았던 손과 발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밤에는 대부분 내 몸이 그런 상태였다는 것도 생각났다. 어쩌면 그날 나의 낮을 쌩쌩하게 지켜주던 카페인님은 이미 떠나갔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었던 것 아닐까. 긴장하고 잔뜩 움츠러든 몸은 아직 잠을 환영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자다. 잠에 들다. 잠을 청하다. 잠에 취하다. 잠에 빠지다....

자는 일과 관련된 여러 표현이 있다.

그중에는 "잠이 온다"는 말도 있다.

이 표현이 특이한 점은 자는 사람이 아니라 '잠'이 주어라는 것이다. 마치 잠이 나에게 와줘야 잘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몸과 맘을 열어 오는 잠을 막지 않는 방법들은 없지 않은 것 같다.




*카페인의 분자 구조는 아데노신이라는 물질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데노신은 휴식이 필요할 때 우리 몸에서 분비되어 졸음을 유발하는 물질로 몸 곳곳의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함으로써 작용한다. 그런데 비슷한 구조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아데노신 대신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하고, 결국 아데노신의 작용을 억제함으로써 각성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커버 이미지: Cottonbro 님의 이미지, 출처: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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