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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Jan 04. 2021

장류진(2019), 일의 기쁨과 슬픔

우리 모두 잘 살아봅시다, 끙차


  최근 가장 중복구매를 많이 한 책이 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장류진 작가의 단편집「일의 기쁨과 슬픔」이다. 선물용으로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넣을 때마다 알람이 뜬다. 이미 구입한 책이라고. 예, 저도 압니다.  


  취업을 하고 난 뒤 내가 마실 커피 한 두잔 값을 아껴 누군가에게 책 한권 선물할 수 있을 만큼의 볕이 지갑에 들었다. 그 뒤로 주변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한 두권씩 하고는 했는데 2020년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었다. 특히 주로 내 주변의 내 또래 직장인들에게 많이 선물하게 되더라. 이상하게 그들을 떠올리고 있으면 이 책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책을 선물 하거나 추천해준 사람들은 다양했다. 평소 한국 소설은 지루하고 곰팡내 나서 잘 안 본다는 언니, 나보다도 더 많은 책을 읽는 언니, 직장 내에서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 분투하는 친구, 드디어 결혼 준비를 시작하는 친구, 연구실에 갇혀 사는 도비 오빠 등등. 책을 읽고 난 뒤 그들이 내게 남겨준 후기는 세세하게는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재미있었다는 거. 왜 선물했는지 혹은 추천했는지 알 것 같다는 거. 그러나 그 대목에서 의구심과 호기심이 들었다. 내가 추천한 이유와, 그들이 추론한 이유가 과연 같을까? 분명 그들 나름의 고민과 고충을 이 책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그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고, 듣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대의 카카오톡 짧은 몇 줄로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기엔 좀 머쓱하고 괜히 우물쭈물 하게 되더라.


  책 속 단편들에는 어쩐지 나를, 내 친구를, 내 주변 언니를, 내가 공연히 싫어하는 지인을, 친구들 사이에서 '걔가 그랬다더라' 이야기 속의 '걔'를 떠올리게 만드는 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구 하나 내 주변이 투영되지 않는 순간들이 없었다. 지금 직장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다닐 수 있을까,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도 해야 하는데, 결혼은, 결혼할 돈은 언제 모으지, 할 수나 있을까,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파묻힌 내 덧없는 꿈들, 심지어는 '내가 널 좋아하는데 넌 왜 날 안조아해조! 이 나쁜 년'을 외치는 진상까지.


  그러면서도 책이 한 없이 무겁느냐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어쩐지 내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 내 주변 풍경들이 재생되면서도 결국 현실의 우리가 아등바등 얼레벌레 살아가는 것처럼 이야기들도 그렇게 끝난다. 내가 느끼기에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에는 드라마틱한 결말과 파국이 없다. 그게 허무하거나 허탈한 게 아니라 외려 반가웠다. 


   책 말미에 수록된 인아영 평론가의 해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감정에 침잠해 있기보다는 가볍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 개인들은 특별하게 빼어나지도 눈에 띄게 뒤쳐지지도 않는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무거움이 없을 리 없다. 저마다의 무거움과 고충이 있을 테다. 넘쳐버리거나 없어진 것 같은 자아를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단편집을 좋아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공감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삶이 무겁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겁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게 살고 싶다는 내 마음이 얄팍한 것도, 틀린 것도 아니므로. 이게 보편적인 우리네의 모습이므로. 그런 내 모습을 연민과 따듯함을 갖고 비춰주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우리 모두 힘들지만 잘 살아봐요, 끙차.' 하는 마음을 담아. 


  이하는 인상 깊은 구절.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일의 기쁨과 슬픔」중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탐페레 공항」중

 



장류진의 소설은 말한다.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빛나 언니와 '나'에게 동시에 향했던 「잘 살겠습니다」의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이 소설집의 바람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삭막하고 냉혹한 세계일지라도 우리, 부서지지도 먹히지도 말자고, 잘 살아보자고. 장류진 소설의 개인들은 시스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도, 그렇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않으며,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작은 슬픔과 행복을 긍정한다. 

「센스의 혁명」-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




덧1: 모든 단편들에는 그래도 조금 '드라마틱'한 순간이 존재한다. 솔트 쿠키 위에 올라간 소금 조각처럼 짜지만 반갑게. 「잘 살겠습니다」의 언니가 내 계산이 집약된 핸드크림을 받고 기뻐한 것처럼. 먼 이국에서 만난 외국인 할아버지가 내게 선물로 준 사진과, 오랜 기억들과, 할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연락을 해보고 싶어지는 순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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