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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Sep 17. 2021

심리적 취약성에 대한 소고

나의 무능감과 유능감이 초래한 심리적 고통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심리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것만 같은 순간이 되면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질 수 없는 순간이 되면 깊은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서 제시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생각에 우리가 자주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다른 사건들보다 내게 더 치명적이고, 더 아프게 느껴지는 어떤 특정 유형의 사건이나 생각. 나는 이걸 취약점이라고 표현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주로 내가 무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불안이 극심해지고, 감정적이 되며, 정신적으로 취약해진다. 타인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것만 같은 순간, 저 사람이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물론 나도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받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스트레스가 내 자신의 무능함을 느낄 때 느껴지는 것보다 강렬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취약함을 키워나가게 되는지. 그건 아마 우리가 성장하고 살아온 환경과 여러 사람들의 영향이 있겠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취약점의 원인을 탐구하는 걸 그만 뒀다. 너무 오래 그에 매진한 까닭에 어렴풋하게 내 취약점의 근원을 이해한 탓도 있지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취약점의 원인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긴 만큼 명료하게 설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나는 여전히 그 취약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내게는 지금의 고통을 해결하는 게 더 급선무였다. 



  사람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된다. 내가 나의 무능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완벽주의였다. 무능한 나를 보지 않으려면, 완벽하게 행동하자. 공부도 완벽하게, 일도 완벽하게. 그 밖의 많은 것들도 완벽하게. 



  하지만 슬프게도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렇게까지 똑똑하지도 않았고, 진득한 끈기와 인내심도 부족한 편이었다. 돌아보면 자의식이라는 게 뚜렷해 질 중학교 무렵부터 나는 늘 내 안의 무능감과 싸워 왔던 것 같다. 아무리 완벽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도 내가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는 것들을 직면하며 나는 늘 울었다. 그건 사소하게 표현하자면 낮은 수학 점수였고, 절박하게 표현하면 수리 5등급의 성적표였다. 



  필연적으로 취약점을 수용하지 못한 채, 그걸 그저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내 완벽주의는 어릴 때부터 실패를 거듭해왔다. 그때부터 나는 울면서 그 실패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자 더 노력했다. 수리 5등급이 내 대학을 좌우할 수 없게 나머지 과목을 전부 1등급을 받자. 다른 걸 더 잘하자. 다른 영역에서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발굴하자. 



  나에게는 늘 당위가 있었다. 잘 해야 한다는. 못하는 게 있다면 그걸 상쇄할 다른 것들을 더,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그러니 늘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안고 살았다.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꽤 기능적이기도 했다. 내 자신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와는 별개로 완벽을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도달하는 것들은 내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인정을 선사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수리 5등급을 상쇄하기 위해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쌓아올린 포트폴리오로, 당시에 일반계고에서는 일반적으로 잘 택하지 않는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남들이 다 알만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되었다. 나는 늘 무능한 사람이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결과로 대학에 진학해서도 좋은 학점과, 주위의 좋은 평가 그리고 기대 속에서 살았다. 특히 교수와 같은 권위자들의 인정과 칭찬은 늘 무능해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던 내게 너무 달콤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럭저럭 꽤 유능한 편이라고. 



  나는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아주 능숙했다. 어떻게 말하고 표현하면 상대가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지, 내가 유능한 사람으로 비춰질지 아주 민감했다. 어릴 때부터 그게 내 의식의 주요한 화두였으니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노력하면 인정이 등가교환처럼 따라붙던 대학 생활에 취해 나는 대학원을 진학하게 된다. 자대에서 인정받는 학생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토론을 하든 교수님들은 언제나 내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어떤 기회든 내게 먼저 권하셨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무능함에 대한 나의 취약점이 유능감을 경험하는 것으로 상쇄되어가고 있다고. 나는 내가 완벽하게 유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수용했다고. 그리고 나는 이제 나의 무능함을 어느 정도 인정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가 앞서 열거한 이 세 가지의 문장은 모두 틀렸다. 



  무능한 나 자신에 대한 공포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를 유능한 사람이라 인정해주던 이들의 그늘을 떠나는 순간 다시 찾아왔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디든 취업해야 하지만 그에 필요한 자격증을 아직 갖추지 못했을 때. 나는 또 다시 공포에 압도되었다. 실패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매일 울면서 공부했다. 취업을 했지만 내 전공을 살려 입사할 수 있는 많은 곳들의 벌이가 시원치 않고, 고용 형태가 불안정 하다는 사실에 또 좌절했다. 번듯한 직장과 훌륭한 연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보다 더 유능해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 내 미래를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저울질 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직장의 상사와 동료들이 내 유능성을 인정하는 순간 불안과 공포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초라하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 싫었던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냈다. 새로운 사업도 적극적으로 해냈고, 특정 영역의 업무는 상사조차 일을 진행함에 있어 내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던 직장을 퇴사하고, 내가 그토록 원한다고 생각했던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하려는 순간. 또 다시 내 무능감에는 다시 불이 지펴지는 거였다. 



  영어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내 기준 엉망진창인 나의 영어 실력을 마주하며 나는 또 다시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그 언젠가처럼 지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 성적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울면서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무능한 내가' 유학 준비에 실패해서 유학을 가지 못하게 될 상황을 습관처럼 상상했다. 나이만 먹고,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과 시원찮은 벌이로 살아갈 내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친구 누구는 번듯한 직장에서, 탄탄한 전문직으로 한창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다던데. 집도 사고, 차도 산다던데.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하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다시 내 무능감에 불이 붙었구나. 무능감을 어느 정도 다루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전부 다 내 착각이었다고. 사실은 나는 아직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고. 무능감을 상쇄시켜 줄 다른 누군가의 인정에 기대왔던 것 뿐이라고. 그 인정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다시 괴로워진 것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우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너는 널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과대평가 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잘나고 싶어서. 남들보다 내가 대단한 사람일 거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괴로움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화를 냈다. 내가 경험하는 무능감은 적어도 내 안에서는 진짜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 무능감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떤 사건에 고통을 부여한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영어를 못한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조금 겸연쩍은, 그저 사실에 불과한 진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을 고통으로 인식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나는 무능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남들이 다 인정할 만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그 욕구와 당위가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나는 사실 알고 있다. 나는 그 욕구와 당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렇게까지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능해도 괜찮아. 이런 말은 효과가 없다. 괜찮다는 표현에는 이미 유능과 무능이 상정되어 있다. 무능해도 괜찮다고? 아니, 무능함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능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괴로웠다. 유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유능함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게 박탈 당하는 순간 두려워진 거다. 



  무능과 유능으로 표현되는 나의 취약점을 이렇게나 고통스럽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무능을 유능감으로 보상하려 들지 않고, 유능감을 통해 무능한 나에 대한 불안을 달래고 싶지 않다. 무능한 나, 유능한 내가 아닌,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발버둥치며 노력할 거다. 무능과 유능의 감각이 나를 지배할 때, 그로 인해 내가 괴로워질 때 내 상태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 설명하고 이해하려 애쓸 것이다. 물론 한 순간에 내가 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나는 무능과 유능의 감각을 친구 삼아, 그와 어떻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나를 퍽 막막하고 답답하게도 만들고,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인지 비난을 가하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껴안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맞아, 나는 그렇게 자주 느끼는 사람이야. 그렇게 느낄 수 있어. 내 안에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갈고 닦아 놓은 무능감과 유능감의 구덩이가 있거든. 그래서 그래. 내 마음 속에도 여러 명의 내가 있어. 그 구덩이에 잘 빠지는 나. 그 구덩이에 들어가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는 나. 그 구덩이에 내가 빠져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 안에 빠져버린 거고, 그 구덩이만 그저 거기에 있고 나는 그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구덩이만 거기에 있는 것 뿐이야.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야. 구덩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켜보는 것 뿐이야. 언젠가 그 존재가 크게 다가오지 않을 때까지. 흐릿해질 때까지. 그 구덩이에 흙들이 채워져서, 서서히 평평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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