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집이라도 믿어도 될까?

집을 구하긴 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운명인 걸까? 그냥 떠밀린 걸까?

by 심미금


그날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내가 하던 프로그램의 종영이 확정돼서 모든 촬영이 끝났고 약간 남은 후반 작업 외에는 할 일이 없어서 업무가 급격히 줄었다. 매일 울려대던 카톡방과 전화도 조용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을 필요도 없는, 매우 평화로운 상태. 촬영 준비와 촬영의 연속이었던 업무의 굴레를 벗어나 자연인이 된 것이다. 즉, 반백수 상태란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어서 소소한 회의와 방송 준비가 남아 있었고, 그날은 시사(제작진들이 모여 편집된 영상을 보고 수정 사항을 논하는 회의)를 하러 사무실로 가던 중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를 참 좋아하는 게,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속감은 그대로 가지되 급하게 처리할 업무는 없다 보니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한참 일이 진행될 땐 어쩔 수 없이 머리 한쪽이 24시간 풀가동 경계 태세이기 때문에 항상 묘하게 날이 서있을 수밖에 없다. 오전 8시에 전화가 올지 밤 12시에 카톡이 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핸드폰도 붙잡고 살아야 하고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면 바로 응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야말로 자유인. 일은 하지만 24시간 가동될 필요는 없지. 이것만으로도 사람이 한결 여유롭고 너그러워진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에게 적용되는 상황이라 이 시기가 되면 일터에서 만나도 모두 허허 웃는 얼굴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개인의 삶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즈음에 나는 집 구하는 일을 놓고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이 시기에 집 구하는 일에 몰두하는 게 맞지만 도파민이 터져야 움직이는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원래 일이 바쁘고 정신없을 때 집 구하는 일도 함께 해야 전투력이 쫙 올라가면서 24시간을 바쁘게 쪼개서 사는 법. 실제로 지난겨울과 봄을 그렇게 달렸더니, 마지막 녹화를 끝내자마자 내 안의 전투 에너지가 풍선 바람 빠지듯이 푸슈슉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 시기의 나는 '지금 알아봐야 하는데... 지금인데... 아아... 미래의 내가 어떻게 하겠지...'라는 생각만 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게다가 그달 말에는 집 구하는 것 말고도 신경 쓸 몇 가지 이벤트가 더 있었다.

우선 내 생일이 있었고, 바빠서 못했던 게임의 엔딩을 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으며(공부해야 하는 게임이다), 축구를 시작하려고 알아보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10주년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심지어 코로나 이후 6년 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매우 들뜬 나머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행할 때 필요한 정보 루트를 보기 좋게 페이퍼로 만드느라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썼다. 친구들은 처음 가지만 나는 개인 여행으로도 촬영으로도 가본 적이 있는 나라라 그 여행의 가이드이자 정산 담당까지 도맡아 버렸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집 구하는 일에 흥미가 떨어졌다.


원래 도파민은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때, 경쟁자가 출연했을 때 발동되지 않는가.

집 구하기에 꽂혀서 신나게 게 달리긴 했는데 뚜렷한 성과가 없이 몇 달이 지속되다 보니 '재밌다'는 '머리 아프다'로 바뀌기 시작했고, 다른 재밌는 것이 그 위치를 차지하면서 어느새 '숙제'라는 포지션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숙제는 재미없다.


이게 지난 8년 간 내가 독립 못하고 반복해 온 패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일이 완전히 끝나고 월급이 끊기기라도 하면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이 커져서(도파민과 불안은 세트다) 다음에 취직하면, 돈을 얼마 더 모으면 다시 집을 알아보자 하고 결정을 미래의 나에게 던져 버린다. 내 일과 벌이가 불안정한 건 15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인데 왜 꼭 결정의 순간에 그걸 굳이 꺼내 와서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독립하려고 알아보는 상태]를 좋아하는 거지 [진짜 독립]을 할 배짱도 책임감도 없었던 거 같다. 그거 외엔 답이 없다. 여기서 덜컥 진짜 집이라도 구해봐. 그럼 당장 나가 살아야 하잖아? 월세는 조상님이 내주나?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 하는데? 어우 무서워요. 무서우니까 좀 더 미룰래요.



아무튼 그렇게 회피 스킬을 발휘하며 8년 간 잘 도망 다녔는데, 일이 되려면 어떻게든 이어진다더니.

결론은 덜컥 집을 계약하게 됐다.


문제의 그 시사날은 애매한 오후 시간에 회의가 잡혀 있어서 한산한 시간이 지하철을 탔다. 운 좋게 빈자리가 보여서 바로 앉았고 오랜만에 부동산 어플에 들어갔다. 오랜만이래 봤자 몇 주 안 되다 보니 익숙한 매물들만 눈에 보였고, 그대로 유튜브로 넘어가려다가 이번엔 당근 어플을 켰다.


전부터 당근으로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귀찮아서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왠지 당근으로 시세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랫폼 바꾼다고 없던 게 뿅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뭐가 크게 다를 거 있어라고 생각하던 찰나 처음 보는 매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분명 부동산 어플로 이 건물 월세 매물 봤는데? 이런 게 있었나?


의아해하며 두 어플에 올라온 같은 건물의 매물을 비교해 봤다.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양쪽에 다 올라온 것도 있었지만 한쪽에만 올라온 매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근에는 내가 궁금해했던 한 오피스텔의 특정 구조 매물이 올라와 있었다.


위치가 좋고 맛집 지형도 잘 알고(스텝들과 자주 가던 술집이 바로 맞은편 건물에 있다) 개인적인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해서 궁금했던 곳이었는데 여러 구조 중 내가 원하는 구조 매물은 몇 달간 잘 나오지 않아서 못 보고 있던 곳이었다.


'아 이렇게 달라서 사람들이 비교해서 보라고 하는 거구나? 이건 또 새롭네?

근데 이거 보러 또 서울 나오긴 귀찮은데... 오늘 볼 수 있음 보고 아님 말아야겠다'


불과 몇 주 전 폭주기관차 시즌이었다면 바로 전화부터 하고 다음날 집을 보러 서울에 나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만사가 귀찮았던 그때의 나는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란 마인드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나마도 게시자가 부동산이었으니 한 거지, 개인 간의 거래였으면 부담스러워서 연락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메시지라 답변이 좀 늦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 저녁에 집 볼 수 있는데 보실래요?]



오늘 저녁? 그럼 회의 끝나고 보고 난 후에 집에 가는 동선까지 완벽한 걸?

바로 저녁 6시에 집 보는 약속을 잡았고, 이왕 약속이 잡힌 김에 몇 집을 더 둘러볼까 하는 마음으로 어플을 뒤졌지만 딱히 성과는 얻지 못하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어차피 서울로 나오면 왕복 3시간은 써야 하는데 회의 시간이 그거보다 짧으니 집 보는 거까지 하고 가면 성공적인 출근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늘어놓을 [내가 본 집 리스트]가 하나 더 늘어날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게 인연의 시작일 줄은 몰랐지.




회의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부동산 약속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떠버렸다.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 역시 김치찌개. 어쩌다 보니 매물을 볼 때마다 김치찌개를 먹는 거 같은데 별 이유는 없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렇다.


약속 30분 전,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자취남 영상을 보고 있는데 영상 위로 팝업 메시지가 떴다.



[오늘 보기로 한 집 다른 분이 안 보고 바로 계약하신다고 해서 계약하기로 했어요.]



이건 또 무슨 패턴이야. 이거 아파트에 집착할 때 내 이야기 아님?

근데 집 안 보고 계약하는 게 가능한 거야? 그래도 돼?

살아생전 김치찌개를 먹다 식욕이 뚝 떨어지는 일을 겪게 될 줄이야. 김치찌개 광인인 내가.


집을 구하면서 별별 일을 다 겪고 이제 좀 패턴 파악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집을 안 보고 계약하는 옵션이 성사된 걸 보는 건 처음이라 놀랐다. 물론 과거의 나도 그랬던 적이 있지만 그건 실제로 이어지지 않았잖아. 그때 나는 질러 놓고도 후회했었는데, 세상에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필 메뉴도 김치찌개라 지난겨울의 기시감을 느끼며 멍하니 있던 나는 답장을 보냈다.



[헐 진짜요?]



너무 바보 같은데 나오는 말이 그거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메시지를 보내지 말 걸. 아까 회의 끝나고 바로 퇴근했으면 여유롭게 갔을 텐데, 지금 지하철 타러 가면 퇴근 시간에 딱 걸려서 지옥철을 타야 하는데, 김치찌개는 괜히 먹었네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역시 나는 독립할 운명이 아닌가 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빠르게 체념하려던 그때, 부동산에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다른 층에 같은 구조의 매물 들어온 게 있긴 해요.

아직 사이트에도 안 올린 곳인데, 이사 날짜가 좀 많이 남았어요.

괜찮으면 여기라도 보실래요?]



오호라? 이런 전개는 또 처음이네.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것보단 뭐라도 보고 가는 게 오백번 낫지. 못 먹어도 고 아니겠음?

어쨌든 내가 궁금했던 구조는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럼 바로 렛츠고.


다른 집이라도 볼 수 있으면 보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시간에 맞춰 부동산에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가 쓸고 지나간 거 같은데, 원래 집 구하는 일은 이렇게 긴박하고 숨 가쁜 거였지. 근데 그분은 진짜 사진만 보고 계약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남은 김치찌개를 먹었다. 집을 빼앗겨서 기분이 나쁘다기 보단 몇 주가 내가 잊고 있었던 감각, 모두들 집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했고 다들 그렇다면 나도 제대로 임해주는 게 맞다는 생각에 전의가 불타 올랐다. 어디 한 번 가보자고.




흔히들 말한다. 운명을 마주치면 한눈에 알 수 있다고.

마주한 순간의 공기와 온도 습도까지 온몸에 각인된다고.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고. [운명]을.


내가 이 집을 마주했을 때 든 감각은... 기억에 남을 만큼 짜릿한 느낌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기존의 다른 집들을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예상대로 이 오피스텔은 이 구조가 제일 낫구나. 이 구조도 보길 잘했어.'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커다란 창문은 암막 커튼을 쳐둔 상태였고, 복도를 지나 창문을 등지면 작은 주방이 있고 복층이 보이는 구조.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둡긴 했지만 해가 길어진 늦봄이라 채광은 충분했고,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세간 살림이 별로 없었고 청소나 관리도 힘들게 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집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에는 현실적인 집이 오백번 나았다.

오늘의 집이나 유튜브에 나오는 집처럼 예쁘게 꾸며진 집이면 보기에는 좋지만 그 이미지에 매료돼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했을 거 같다. 아직 그걸 간파할 만큼의 경험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를 맞이한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집안의 모습은 자신의 장담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붙박이가 많아 수납공간이 많지만 공간을 꽤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주방 바닥에는 과거 누수 흔적으로 장판이 오염되고 들떠있었다. 벽 한쪽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은 열자마자 도로의 소음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바쁜 직장인의 특징답게 정리나 청소가 덜 된 부분들이 보였고 특히 화장실은 필히 입주청소가 필요할 만큼 찌든 때가 보였다.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손잡이는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고.


아마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이 정도였으니 숨겨진 문제는 더 많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장점도 확실했다.


한겨울에도 매일 환기할 만큼 채광과 환기에 집착하는 나에게 커다란 창문은 엄청난 장점이었고 싱크대 밑을 열어봤을 때 자국이 안 남은 것으로 보아 누수 문제는 해결된 듯했다. 누수로 들뜬 장판만 해결이 된다면 나머지는 내가 커버가능하겠단 판단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복층에 올라가서 침실 공간을 둘러보고, 계단 중간에 서서 집을 둘러보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여기 제가 계약할게요."



그 집에 들어선 지 10분도 안 돼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 길로 바로 부동산으로 돌아가서 이사 가능 날짜를 확인하고 이사 전에 누수 문제 재점검과 도배장판 교체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집주인에게 한 번 더 교체 문제를 확인한 후에 계약금을 입금하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9시쯤 되어 있었다. 12시간 전의 나는 내가 오늘 집을 계약하고 올 거라 상상도 못 했는데. 몇 년을 질질 끌고 왔던 문제가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될 줄이야. 영원히 안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독립을 하게 되는구나. 이게 운명의 집 그런 건가?


신나서 바로 오늘의 집 어플에 들어가서 그간 스크랩해 둔 내 취향의 가구들을 다시 살펴보고 장바구니에 넣고 어떻게 집을 꾸밀지 생각하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즐거운 마음만 가득했는데, 눈을 감으니 마음 한 구석에서 누군가 자꾸 물어봤다.



[너 이거 맞아? 이렇게 쉽게 정해도 돼?]

[네 앞사람이 계약하겠다고 해서 너도 욱해서 휩쓸리듯 정한 거 아냐?]



아니? 아닌데? 나 나름대로 내 기준에 맞춰서 판단한 건데?

판단한 거야. 판단한 거 맞을 걸...?



분명 독립할 집을 정하고 나면 설렘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아직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했는데 나 스스로가 내 결정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한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근데 내가 맞는 선택을 한 건지 휩쓸려서 결정한 건 아닌지 불안해.

이게 맞아?


그간의 경험으로 현실적으로 오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너무 잘 알지만, 불안한 감정은 나를 계속 옥죄어 왔고, 존재했는지 알 수도 없는 긴가민가한 불안과 문제들이 나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질문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서 거의 잠을 설치다 시피 했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고민은 이어졌다. 심지어 계약금을 넣은 후에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집을 구했다고 말을 한 후에도!


마음이 불안한데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내 마음이 힘든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계약을 파기할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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