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얼마일까?
미어캣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협에 잔뜩 긴장한 채로 망부석처럼 서서 드넓은 사막을 바라보는 미어캣.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예리한 비유를 해서 속으로 뜨끔했다. 스스로도 내 안의 변화를 느끼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니까.
내면 안에 균열이 생겼다는 걸 깨달은 건 3-4년 전쯤이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걱정이 불쑥 튀어나와 내 뒤통수를 찔렀고 그럴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괜찮지? 별일 없지?'라는 생각을 하며 경계하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걱정의 주체는 대부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안위. 대부분은 명확한 이유도 없는 말 그대로 [걱정]이라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일상에 의문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동생 가족이 본가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그날 밤에 사이렌 소리가 난 적이 있었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기계 오작동이 많았던 시기라 그 사이렌 역시 짧게 웽 울리고 끝났지만 웬일인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걱정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보통은 아예 무시하거나 무슨 일이지? 하고 창 밖을 쓱 보고 마는데 그날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잠옷 차림으로 밖에 나와 (영하 10도였다) 추위에 떨면서 아파트를 한 바퀴 빙 돌며 정말 무슨 일이 없는지 순찰을 했었다. 패딩을 입고 나올 생각도 못해서 너무 추운데 발걸음은 멈출 수 없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늘 다니던 건물을 갔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밖에 나가고 싶어 진다거나,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싸한 느낌이 들어서 피하고 싶다거나 하는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안에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알 거 같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건 사고가 너무 많기도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평범한 일상이 위협받을 뻔했다는 걸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으며, 무엇보다 30대 중반을 넘기니 내 주변 환경의 변화가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나는 어릴 때와 다를 것 없는데 가까운 이들의 삶의 형태는 한 해가 다르게 변화했으며, 옆에서 그 크고 작은 변화를 지켜보고 간접 체험을 하다 보니 예전에는 알지 못했을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돼버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소중한 것이 생기기도 했고 소중한 것을 잃기도 했으며, 세상의 이면에 대해 쓸데없이 더 깊게 이해하게 돼버렸다. 아마 내 겁은 여기서 기인한 걸 거다. 어른이 될수록 겁이 많아진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물론 나에게 '미어캣 같다'라고 말해준 분의 의도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변화를 빨리 캐치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게 능력이다'이라는 것이었다. 좋은 의미라는 건 아는데 알지 않아도 될 걸 알아버린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똑같이 비상 모드가 켜질 거라면 그에 이름을 붙이고 언제 모드가 켜지는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의 비상 모드가 켜지는 걸 [미어캣 모드]라고 명명했고, 급 불안해질 때면 '또 미어캣이 동굴에서 나왔구먼.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이니?'라고 불안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마음처럼 쉽게 되던가. 심지어 이 미어캣 모드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뜬금없이 아무 때나 발동한다는 점이었다.
평소에도 가끔 듣던 사이렌 소리가 한겨울의 그날에는 참을 수 없어 집 근처를 배회했듯이, 어느 날 불안이 확 덮치면 피할 방법도 손 쓸 방법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모든 것을 던지고 도망가고 싶어 한다. 일단 포기하면 불안이 잠재워질 거라 믿었던 거 같다.
그리고 가장 최근 어이없게 미어캣 모드를 발동시킨 일은 집 계약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취 공간을 찾자마자, 계약 의사를 밝히자마자 미어캣이 깨어나더니 당장 모든 걸 중지하고 외쳐댔다. 그 오작동 때문에 어렵게 찾은 집 계약을 파기하기로 마음먹기까지 했으니까.
집을 구하고 실제 계약과 이사까지는 텀이 있었다. 애초에 부동산에도 올라오기 전인 매물을 보고 계약하기로 했으니 기간이 많이 남은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초보인 데다 걱정도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 긴 공백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아버렸다.
필요한 조율을 부동산 통해서 하고 가계약금을 넣고 계약날짜를 잡고 보니 남은 기간은 2주. 그리고 그 2주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드디어 집을 구했다고 이야기하고, 집을 볼 때 찍은 사진을 보며(현 세입자 허락하에 찍었다)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예산은 얼마나 들지 체크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서울에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게 너무 부럽다며 필요할 때 하루 빌릴 수 있냐는 농담을 했고 싸게 모실 수 있으니 DM 달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즐거운 것도 단 며칠, 어느 순간부터 묘한 불편함이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 드는데, 알 길이 없어서 집을 생각하면 즐겁다가도 기분이 축 처지고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들곤 했다. 이 감정의 정체를 모르니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서 불편한 상태로 며칠을 보내야 했다. 드디어 바라던 독립을 하게 됐는데 이 우중충한 기분은 뭐람?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중충함에 갇혀 4~5일쯤 보냈을 때, 이 감정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잠잠 코 있다 했던 내 안의 미어캣이 고개를 든 것이었다.
"근데 요즘 원룸 사건 사고 많다던데 괜찮겠어? 거기 안전한 거 맞아?"
"월세는 얼마야? 관리비는? 너 그 돈 감당 되겠니?"
"그냥 나오지 마. 혼자 사는 게 얼마나 빡센지 알아? 부모님이 나가라고도 안 하는데 왜 굳이 나가?"
분명 세상 어딘가엔 내가 모르는 매뉴얼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독립이 결정됐다고 이야기하면 축하와 함께 이 질문들이 꼭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처음에는 "아 내가 앤 줄 알아. 내가 독립을 몇 년 준비했는데 다 알아봤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야 한두 번 지나가듯 하는 이야기였겠지만 내 입장에선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화를 내기엔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 화를 내고 난 후가 찜찜할 거 같았다.
예전 같으면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좀 하라고 했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감정을 깎고 억누르는 게 익숙해져 있다 보니 즉각 반응대신 못 들은 척 넘기는 일이 잦아졌고, 풀리지 않은 화는 내면의 미어캣을 툭툭 건드는 역할을 했다.
야, 야 일어나 봐. 너 일 안 해도 되겠냐? 얘가 지금 혼자 선택하고 결정하게 두는 게 맞아?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내 안에 미어캣이 깨어났음이 느껴졌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에 온갖 불안과 걱정이 떠오르며 경보를 띄우기 시작한 것이다.
[1층이 상가랑 연결되어 있는데 진짜 안전하겠어? 거기 고깃집도 있는데 술 마신 사람들이 다닐 거 아냐.]
[너 집 보러 갔을 때 같은 라인 이웃들 한 명도 못 봤잖아. 괜찮을까?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
[요즘 서울에 싱크홀 사고가 많던데 지하철이 가까워서 영향이 가지 않을까?]
[너 그 집 꼼꼼히 안 봤잖아. 네가 못 본 하자가 있으면 어떡해?]
[언제 다시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월세랑 관리비 감당이 될까? 모아둔 돈 다 쓰고 나면 어떡하지?]
이미 다 알고 있던 일인데 새삼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내 안에 경보가 끊임없이 울렸고, 경보가 울리자 미어캣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경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키는 집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머릿속에 계속 경보가 울렸다. [위험 위험 위험]
평소에 잠을 설치는 일이 거의 없건만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겨우 조금 눈을 붙이고 일상을 이어 가려는데, 잠을 못 자서 피곤한 것도 있지만 내 안에 미어캣이 끊임없이 위험 경보를 내보내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 아유 시끄러워 아유 피곤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경계경보를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일상을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어캣은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우고 더 큰 목소리로 위험을 외쳐댔다. 내가 듣고 반응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갖고 24시간 끊임없이 경보를 띄워대니 (심지어 좀 잦아들었다가 확 소리가 커지는 식으로 템포 조절까지 했다) '이러다 말겠지'란 생각으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경보 중에 내가 집을 구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몰랐던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새롭게 느껴지는 걸까?
새로운 경험을 하기 전엔 늘 긴장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독립이라는 일생에 해본 적 없는 큰 스케일의 문제를 맞이하다 보니 미어캣이 더 폭주하는 걸까? 근데 지금 저 말을 들어주면 다음엔 안 그런다는 보장이 있나?
머리로는 이 순간을 견뎌야 한다는 걸 알긴 아는데, 머리로 안 다고 경계경보가 사라지는 게 아닌지라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는 속 시끄러운 상황만 계속된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그 불안에 슬슬 전염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턴 '그냥 가계약금 버린 셈 치고 빨리 포기할까? 거기가 내 집이 아닐 수도? 혹시 다음에 볼 집이 운명의 집이었는데 내가 놓친 건 아닐까? 아니 그냥 부모님한테 월급 상납하고 평생 같이 살까 봐. 그게 서로한테 더 안정적이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성인이라면 응당 독립을 해야 하거늘. 분명 그 생각을 갖고 의지를 다지며 집을 구해놓고선 이제 와서 다 포기하는 게 맞는 선택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갖게 되다니.
하지만 내가 이 논리 비약을 전개하자마자 내 안에 경계경보가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아 역시 이게 정답이었구나. 그럼 정답으로 가야지.
주변의 우려 + 내면의 잘못된 미어캣 모드로 지친 나는 이상한 결론을 내고 다음날 일찍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내면의 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매우 잘못된 선택을 하러.
지하철을 타고 1시간 30분. 길바닥에 시간을 허비하며 찾아간 오피스텔은 내가 계약한 그날처럼 평화로웠다. 아니 정정. 오피스텔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평화로웠다. 단지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달라졌을 뿐.
무작정 오긴 했는데 부동산과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안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건물을 구경했다. 계약을 파기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 믿으면서 왔건만, 정작 그 앞에 서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동산에 가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계약 파기할게요.'
'왜요?'
'음... 미어캣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요.'
이게 맞냐. 이게 맞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이미 알고 있던 조건들을 긁어모아 억지로 문제로 만들어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다니.
너 계약이 장난인 줄 알아? 저기 들어간 가계약금이 얼만데. 니가 지금 땅을 파도 저 돈은 못 모은다고.
그리고 미어캣이 너를 위해 경계경보를 띄우는 게 맞긴 해?
남이 보기에 잘못된 선택일지 언정 그 순간 내가 그게 맞다고 믿는 다면 행동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이게 잘못된 선택이란 걸 안단 뜻이었다. 근데 미어캣은 내가 조금 마음을 바꿀라 치면 다시 웽웽 대며 경계경보를 울렸고, 부동산 앞까지 오고 나니 이성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정신 차리라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문제를 해결하러 왔더니만 더 속 시끄러워졌네. 오늘 안으로 뭔가 결정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돌아버릴 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다가, 일단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부터 주문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스스로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더 어린 나이에 독립을 했더라면, 진학이나 취업 등 의례 독립하는 [강제적인 이유]가 있던 때에 집에서 나왔다면 이런 고민을 안 하고 있었을까? 어떤 문제가 고개를 들더라도 '근데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잠재울 수 있으니까. 과거 이야기는 해봤자 소용없고, 그때나 지금이나 경기도에서 서울을 오간 건 똑같으니 의미 없는 가설이긴 하다.
겉보기엔 평일 낮에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팔자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만, 내 안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이대로 계약 파기해! 당장 본가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미어캣과 '너 언제까지 부모 품에 살 거야? 진짜 독립 안 할 거야?'라고 외치는 이성. 둘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건 알겠는데... 아 귀 아파 진짜. 화내지 말고 얘들아... 알았어 오늘 안에 뭐든 결정할 테니까 조용히 해봐 봐 좀 생각하게!
결국 메모장을 꺼냈다.
마음이 불안하고 속 시끄러운 게 해결 안 될 때 하는 일인데, 머리에 드는 생각과 불안을 싹 다 적어 놓고 하나하나 해결 가능한 일인지 가늠해 보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썼던 리스트는 대략 이렇다.
와 38살에 첫 독립하면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네 그게 저입니다.
내가 바보 같은 건 이제 숨길 필요도 없고 숨겨봤자 숨겨질 일도 아니지만.
아무튼 당장 떠오르는 질문들을 적어놓고 하나하나 지워가보기 시작했다.
일단 이사 갈 집의 안전과 이웃들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게 없다. 계약 당시에 경비원 분들이 24시간 상주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웃들은 대부분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딱 나 같은 사람들. 아 특히 여자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월세랑 관리비는 이미 정해져 있기도 했고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 6개월치를 빼놓은 상태였다. 현재 일을 안 하고 있어서 불안하긴 하지만 직종을 바꾸든 쿠팡을 가든 뭐든 할 생각이라 쿠펀치 어플에 위치 업데이트해 가장 가까운 센터가 어딘지도 찾아봤다. 더운 것만 살짝 가시고 가서 일하면 적어도 관리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독립해서 돈을 모을 수 있는가는... 진짜 내 문제. 솔직히 본가에서는 집안일하고 생활비를 조금 드리긴 했어도 공짜로 살았던 거나 다름이 없었고, 언제까지 공짜로 부모님에게 기생할 순 없으니 이제 직면하고 해결을 봐야 할 타이밍이긴 했다. 사실 이 문제가 제일 걱정되지만 원래 불안을 감당하며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게 진짜 어른 아닌가? 진짜 어른이 되겠단 각오로 독립을 결심한 거기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ㅎ... 인륜지 대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금 원베일리에 살고 있었겠지? 그래도 마음이 영 불안해서 오피스텔에 온 김에 비상계단 위치랑 근처에 지정된 대피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을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보통 이쯤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1-2번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건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를 하거나 알아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1, 2번은 그야말로 랜덤이고 100% 다 알 순 없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알아보고 싶단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부동산으로 향했다. 이쯤 되면 이건 나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을 땐 물어보는 것만 한 게 없었다.
물론 약속을 하고 오지 않아 부동산에 아무도 없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중개사가 부동산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태세였다.
다행히인지 불행인지 부동산에는 사장님이 있었다. 게다가 업무로 바빠 보이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가계약하고 간 나를 기억하는 사장님은 무슨 일이냐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내가 어떤 바보 같은 소리를 할지 모르고.
일단 부동산 의자에 앉긴 했는데, 이 친절한 사장님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붕어처럼 한참을 뻐끔거리며 눈을 굴렸다. 있지도 않은 회의가 근처에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는 거짓말을 했던 거 같다.
그러자 사장님은 마침 잘 왔다며 집주인과 집수리건으로 조율된 사항, 현 세입자의 이사 일정 등 그간 정리된 상세 내용을 알려주었고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메모장으로 받아 적으며 사장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장님의 이야기가 끝난 후, 어렵게 부동산을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사장님... 저 계약... 안 할까 봐요. 아니 저도 잘 모르겠는데 이게 마음에 걸려서..."
그게 아니잖아 이 바보야. 제가 이런 이런 문제 고민이 있는데 한 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좀 성인처럼, 어른처럼 이야기할 순 없는 거니?
일할 땐 안 그러면서 네 일에는 왜 이렇게 애처럼 구냐. 답답시럽네 진짜.
내면의 탄식과는 별개로 입이 한 번 뚫리자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지난 며칠간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질문들이었으니.
갑자기 왜 그러냐는 사장님에게 나는 정말 별별 이야기를 다 꺼내며 궁금증을 토해냈다.
집수리 문제부터 오피스텔 안전 문제, 이웃 문제에 오피스텔 주차장 이용방식과 비상계단 여부까지.
내 이야기를 듣던 사장님의 표정이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매우 당황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말하는 나도 어이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열심히 걱정을 쏟아내고 나니 묘한 기분이 내 안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미어캣이 고개를 들었을 때처럼, 싸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 상황은 그대로인데 입 밖으로 고민을 꺼낸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된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말을 마칠 때 쯔음에는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평화로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내내 시끄럽게 굴던 내 안의 미어캣들이 자취를 감추기라도 한 것처럼 내면이 고요해졌다. 니들이 난리를 쳐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건데 끝장을 보던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마치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홀가분하게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니.
한참 토해내듯 말을 하고 나서 이 기묘한 감각에 사로 잡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많이 불안하긴 하죠. 걱정할 수 있는 문제예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알아봐 줄게요. 잠시만요."
그리고 사장님은 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금세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내 이 멍청한 고민을 공유하게 될 거라 생각이 들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들자 미어캣이 다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나와 함께 초조한 눈빛으로 사장님을 바라봤고, 곧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은 양해를 구한 후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돌렸다.
"이번에 새로 계약하기로 한 분인데 마음에 걸리는 게 좀 있대요. 같이 대화해도 괜찮죠?"
바로 오피스텔 관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질문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 다 풀 수는 없지만, 오피스텔의 관리 시스템부터 궁금했던 내용들을 물어보고 대화를 갖는 시간을 가졌다. 오피스텔 자체 문제는 이렇게 해결했고, 집 문제는 조율 사항을 다시 공유해 주고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는 계약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부동산까지 찾아온 기백이 무색하게 이미 문제가 해결된 듯 마음의 평화를 얻은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장을 답변을 받아 적고 계약날 보자는 인사와 함께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기력이 다 빨린 느낌이라 그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비타민 음료수를 사서 다시 전해드리고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누가 붙잡을 세라 지하철을 타고 급하게 서울을 벗어났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평온하게 잠을 잤고, 며칠 간의 경계 레이더가 무색하게 미어캣들도 잠잠해졌다.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미어캣은 어떻게 됐냐 물으신다면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여전히 레이더를 세우고 틈만 나면 고개를 들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날을 세우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받아들이며 이곳의 룰을 익히는 중이다.
이렇게 끝날 일을 가계약금을 날릴 결심까지 하다니. 진짜 그렇게 됐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마 여전히 나는 입으로 독립을 외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낯서 문제가 생기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원히 회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게 잘못됐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방식은 아닌 게 맞는 거 같다.
미어캣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그들에게도 룰을 알려주고 세상에 대처하는 법을 함께 익혀야지. 내가 싫다고 한다고 내 안에 미어캣이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일단 이 사건으로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을 배운 거 같다. 이렇게 평생 배워가야지.
독립을 해야 어른이 된다더니, 이 늦은 나이에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시작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