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인간들, 우리는 줄자의 축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진짜 뭐 하지?'
온갖 셀프 역경을 뚫은 지난 5월의 어느 날, 나는 첫 월셋집 계약서 쓰기에 성공했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맑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 앞에 차가 깜빡이 없이 차선을 바꾸고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머리부터 들이밀어도 좋다고 허허 웃었다. 소중한 월세 계약서가 만원 지하철에 끼여 구겨지는 꼴은 볼 수 없어서 아빠 차를 빌려 조수석에 계약서 올려 둘 자리까지 마련하고 약속시간보다 여유롭게 서울로 향했다.
계약날 처음 본 집주인은 부모님 또래의 매우 인자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사실상 계약 전에 몇 가지 사항을 조율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지 양쪽 다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에 가진 만남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계약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잔금일정을 확인하고 사인하고 나면 끝.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준비하는 동안 뉴스에 나온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집에 대해선 이야기할 게 더 이상 없었다.
"급한 일 없으면 주민센터에 전월세 신고하고 가세요. 한 명만 하면 되는데 어차피 확정일자 받아야 하니까 아가씨가 하는 게 나을 거예요. 한 달 넘기면 과태료니까 꼭 하셔야 해요."
계약을 마치고 부동산을 나서려는데 부동산 사장님이 나를 붙잡았다. 처음에는 전입신고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알고 '그거 이사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되물었는데, 전월세 신고랑 전입신고는 또 다르다고 한다. 혹시 나처럼 부동산 계약을 처음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간단히 알려 드리면
이러한 차이가 있다. 부동산 세계는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알아봤는 데도 놓치는 게 나온다.
아무튼 급한 일도 없고 부동산에서 뭔가 하라고 알려주면 바로 움직이는 게 상책이다.
이야기할 게 남았다는 두 분과 인사를 하고 서류를 들고 주민센터로 가 전월세 계약 신고까지 마쳤다.
내 이름 아래 새 주소지와 확정일자를 부여받은 서류까지 받으니 독립이 현실이 된 게 느껴졌다. 내가 서울에 돌아오다니. 무려 29년 만이다. 소중한 서류들이 다칠 세라 파일에 끼워 조수석에 고이 모셔놓고 즐겁게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부모님께 서류를 보여드리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서류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이제까지 계약이라고 해봤자 프리랜서 업무 계약서나 출연자들에게 받던 출연 계약서뿐이었는데 내가 부동산 계약을 하는 날이 오다니. 심지어 따라오겠다는 부모님을 물리치고 나 혼자 다녀왔다. 세상에 이거 완전 어른 같잖아?!
항상 궁금해하던 인생의 한 단계를 넘은 것을 자축하며 서류를 책상 서랍에 넣고 핸드폰을 든 순간, 그때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근데 이제 뭐 하지?'
사실상 다음 스텝도 예정되어 있긴 했다. 현 세입자가 나간 후 도배장판 공사하는 게 약 일주일, 그 이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이사 날짜에 맞춰 가구를 주문하면 됐다. 한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구는 대충 정해져 있으니 필수품 위주로 사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건 살면서 필요하다 생각될 때 채우면 된다. 심지어 동생이 결혼할 즈음에 작은 방으로 셀프 이사를 한 번 해봐서 내 취향이 어떤지도 얼추 알고 있기 때문에 가구 고르는 것도 특별히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예산 문제만 빼면.
계약이란 큰 산을 넘었으니, 이제 천천히 채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왜 심장이 뛸까?
처음엔 첫 독립에 설레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와는 결이 좀 달랐고,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을 실행할 생각 하니 싱숭생숭해진 건가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뭔가 애매했다.
쿵쿵 심장이 뛰니까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 흡사 밤샘작업을 하면서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을 때 뇌는 잠들어 있는데 심장은 깨있는 이상한 엇박자가 느껴졌다.
이럴 땐 잠을 자는 게 최고인데 가슴이 쿵쿵 뛰니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 누워 오늘의 집 어플을 구경하며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물건에 하트를 누르기 시작했다. 실용성보단 일단 내 눈에 들어오는 예쁜 디자인 위주로.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는데 문득 '어?'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안의 정체 모를 엇박자가 뭔지에 대한 감이 왔다.
나는 다음 스텝을 어떻게 밟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계약은 계약서라는 실문을 만짐으로써 나에게 현실이 됐고, 이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인터넷에 이사 순서에 대해 작성된 글을 봐도 임장부터 계약서 작성까지 꼼꼼하게 내용이 나와 있어도 그다음부터는 전반적으로 두루 뭉술했다. 알아서 이사 준비를 하시면 되시겠습니다. 근데 나는 그 알아서를 할 줄 모르는 왕초보인데요...? 그래서 뭐부터 해야 하는 건데요?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순서 좀 알려주세요.
그래서 관련 글을 또 찾아서 읽어보는데 이것도 신경 쓰고 저것도 신경 쓰고 사기도 조심해야 하고, 이런 악용 사례가 있었고. 알아보다 보니 머릿속이 더 엉키는 느낌이라 핸드폰을 껐다.
아이고 큰 산 하나 넘었다 했더니 또 다른 산이 오는구나.
이걸 모르니까 내 안에 비상 신호가 켜지면서 몸하고 마음이 따로 놀고 있었구만.
인터넷만 쳐보면 웬만한 일은 다 처리가능한 시대가 온 지 오래다. 모르는 게 있어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보가 나왔고, 잘 모르는 분야도 비슷한 류의 글을 몇 개 읽고 정리하다 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이 간단한 일에 내가 왜 막막함을 느끼냐면, 이 산재한 일들을 모아서 내 손아귀에 쥐어줄 아날로그 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요술봉이 없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아마 30대 후반 이상인 분들은 공감할 텐데, 아무리 인터넷을 잘 활용해도 마지막 순간엔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보는 알겠는데, 그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몸으로 체득하든 실물을 만지든, 하다 못해 깜지라도 써야 비로소 내 것이 돼서 완전한 이해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다음이 보이기는 건 말모.
집 계약까지는 집주인과 부동산에서 직접 만나 대화하는 [과정]과 직접 쓴 계약서 [실물]을 손에 쥐게 됐으니 해결됐는데 그다음은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심지어 첫 독립이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만의 공간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잘하고 싶은 욕심에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너무 일이 할 일이 많은 것도 문제다.
고민을 이야기하니 친구 몇 명이 오늘의 집 3d 인테리어를 해보라고 추천해 줬다. 결국 어떤 가구가 들어오느냐가 공간의 분위기를 좌우할 텐데, 원룸은 공간이 작고 한정되어 있으니 도면을 구해 가구 배치를 연구해 보면 감이 좀 잡힐 것이란 거였다.
과연 인생 선배들의 조언은 효과적이었다. 인터넷에서 내가 이사 갈 집의 도면을 찾아 적용시키고 가구들을 불러 내서 하나하나 조합해 보기 시작했다. 원형 테이블을 배치하면 어떤 느낌인지 소파를 둘 수 있는지, 책상도 창가에 붙이는 게 좋을지 세로로 놓는 게 좋을지 등등. 게다가 이미 능력자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꾸며놓은 도면을 많이 올려놔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아날로그 인간에겐 결국엔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처음엔 이리저리 조합하는 것으로도 꽤 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공간의 한계상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구조는 몇 개 되지 않았고 그 구조들을 추리고 나니 다시 흥미가 떨어졌다. 게다가 3D로 백날 천날 기깔나게 만들어도 이건 컴퓨터 안에 있을 뿐 실물을 만져볼 수가 없다.
지금이야 말로 밖으로 나가서 직접 가구들을 만져볼 때인 것이다.
무릇 아날로그 인간에게 이사준비란 직접 보고 만져보고 체험해 보고 이게 내 집에 맞는 사이즈와 무드를 가졌는지 가늠도 해봐야 한다. 그런데 이걸 바로 실행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생각보다 가구를 보러 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집 근처에 널린 게 가구 매장, 전자기기 매장, 심지어 백화점에 가면 다양한 브랜드가 다 모여있는데 뭐가 문제냐 할 수 있다. 코스트코만 가도 소파가 떡하니 있는데 뭐가 문제야.
분명 거기에 가구가 있는 건 맞는데, 정작 나한테 필요한 가구는 없었다.
나는 10만 원 대에 비싸지 않으면서 책상 겸 식탁 겸 화장대 겸용으로 쓸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월넛 색상의 책상을 보고 싶은데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매장에 있는 가구는 대부분 더 크고 화려하고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가격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책상은 1인 가구든 4인 가구든 규격화된 사이즈가 있어서 좀 나은 편이지, 소파나 아일랜드는 엄두도 못 낸다. 자취생들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소파병에 걸려서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백화점과 가구 매장을 다녔는데, 1인 가구는 고사하고 최소 3인 이상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사이즈의 소파들만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정말 마음에 들면 들일 순 있겠지만, 아마 그랬다면 집 안에서 어딜 가든 소파 위를 걸어 다녀야 했을 것이다.
백화점에 가니까 그런 거지, 이케아에 가면 1인용 가구로 쓸 것들도 많은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다.
맞다. 그나마 이케아는 종류도 다양하게 1인용 가구들이 집에 들일만한 것들이 많아 구경할 만했다. 하지만 가격이 착하다고 하진 않았지.
오늘의 집 어플에서 내가 본 소파는 10만 원 대였는데 이케아에 1-2인 가구용 소파로 유명한 제품 가격이 50만 원대... 제가 가격 걱정을 안 하고 막 지를 수 있었으면 애초에 고민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임니다...
그나마 내가 오프라인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이케아와 모던하우스, 무인양품 정도인데 여기만 전전할 순 없는 노릇이라 노선을 바꿔봤다.
인터넷에서 본 브랜드 쇼룸을 검색해 보고 그중에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의 있는 매장을 가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가구 하나 보러 찾아가기에는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고 이 일 하나에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쇼룸은 보통 경기도 외곽에 있어서 반드시 차로 가야 했고,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존재했지만 서울 출퇴근이 잦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업무 패턴과도 안 겹치는 애매한 위치에 동떨어져 있어서 오직 그 매장을 가보기 위해 반나절을 써야 했다.
그나마도 이건 쇼룸이 있는 경우였고, 내가 찾아본 브랜드의 대부분은 쇼룸이 존재하지 않았다.
쇼룸을 운영하려면 유지 관리비와 인건비가 들기 마련이고 이것들은 고스란히 제품 가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1인 가구가 가구를 볼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게 디자인과 가성비인데, 그들의 니즈에 맞게 가구를 생산하는 업체들 중에 그 니즈를 유지하면서 쇼룸을 운영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사실 내가 갔던 몇몇 매장들도 1인 가구용치고는 가격대가 좀 나가는 곳들 뿐이었다. 제품 단가가 어느 정도 되니까 유지할 수 있는 곳이었지 나 같아도 쇼룸 운영은 엄두도 못 냈을 거 같다.
조금 생뚱맞지만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오늘의 집에서 인기 제품들만 모아서 쇼룸 좀 만들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국 어디에 있든, 심지어 입장료가 있어도 존재하기만 한다면 차를 끌고 갈 의향이 있는데 말이지. 아무튼 내가 가구를 알아볼 당시에는 그런 공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드래곤볼 모으듯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별 소득 없이. 심지어 이것도 내가 돈은 없어도 시간은 넘치는 백수인 데다 아빠 차를 빌려 쓸 수 있는 처지여서 가능했지 뚜벅이였다? 그냥 인터넷으로 감으로 고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자제품도 사정은 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TV는 좀 구경할 수 있었는데, 건조기를 들일까 말까 고민하던 시기에 실물을 보고 싶어서 여러 매장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역시 결혼하는 신혼부부가 신혼 가전을 맞출 때 보는 비싼 라인들만 존재했고, '건조기는 사치다'라는 결론만 내리고 돌아왔다. 방 한구석에 건조기 자리를 마련해 놓긴 했는데, 저 자리가 채워질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다음 전략으로는 가구 박람회 공략에 나섰다. 마침 내가 가구를 보던 그 시기 즈음에 동생 부부가 캠핑을 시작해서 캠핑 박람회에 따라갈 일이 있었다. 박람회는 일 아니면 가본 적이 없어서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따라가 보니 다양한 제품들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제법 재밌어서 '가구 박람회를 이용해 보면 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마침 내가 알아볼 즈음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구 박람회가 몇 개 잡혀 있었고, 바로 신청해 그곳들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과는... 참패.
어떤 주제냐에 따라 박람회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가구라는 특성 때문인가?
가구 박람회는 백화점이랑 정말 1도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백화점보다 더 경직된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대부분 신혼부부, 신축 아파트 입주에 맞춰진 가구들만 들어와 있었고, 심지어 아이를 위한 가구도 있는데 1인 가구를 위한 가구는 눈 씻고 찾아볼래도 없었다.
캠핑 박람회 때는 몇 시간을 발에 불나도록 돌아다니고도 아쉬워하며 나왔는데 가구 박람회는 쓱 둘러보고 더 볼 게 없어서 미련 없이 돌아 나왔다. 제일 길게 본 게 1시간 정도? 안 본거 보단 나았겠지만 굳이 시간과 돈을 들일 이유가 있었나 싶다. 뉴스에서 보면 1인 가구가 폭증한다는데 왜 그들이 관심 갖는 걸 보는 것은 어렵나 궁금했다. 아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심정이네.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도 한 달 넘게 허탕만 치고 다닌 거 같다.
구경은 다니는데 감은 안 오고 이사 날짜는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그렇게 내가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갔다.
그냥 유행하는 거, 후기 많은 거로 살까?
이사 후에 모든 걸 결정하자니 인기 많은 가구 몇 주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던데, 미리 주문하고 배송 날짜 지정하는 게 낫지 않나? 뭐 내가 엄청난 안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건 대체로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근데 그러긴 싫은데... 심지어 공간이 작으니까 물건 하나 들이는 것도 더 신중해야 할 거 같고, 첫 독립인데 아이템 하나도 예쁜 걸 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머릿속에 확 불이 켜진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앉아있는 이 작은 방, 지금 쓰고 있는 책상, 서랍장 등등.
'지금 내 방에 있는 가구 사이즈부터 재보면 되잖아?'
이사 갈 집은 집을 보던 날 10분 남짓 본 게 전부지만, 계약서에 사이즈가 나와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실제 공간을 봤기 때문에 대략적인 공간에 대한 감각은 가지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그즈음에는 어느 공간을 가든 '음 이사 갈 집의 몇 배는 더 크군' '이 집 거실에 우리 집이 다 들어가겠어' 같은 생각을 습관적으로 했었다.
하다 못해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자그마한 방을 보며 '아무리 원룸이어도 지금 내 방보다 2.5배는 커져.'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럼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사이즈만 알아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한 건 1인용 가구들의 실제 크기, 부피감이 어느 정도인지 체득하는 건데 지금 내 공간에 있는 물건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책상 길이 1200과 1400의 부피감의 차이만 알아놔도 소파를 살지 말지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일단 부피감 파악이 되면 자연스럽게 가구 리스트의 우선순위가 정해질 거고, 그에 맞게 3D 어플을 돌려보고, 마지막으로 최종 결제 전에 이사 갈 집에 가서 길이를 재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현세입자가 이사 가고 공사로 실제 이사까지 일주일 정도 텀이 있기 때문에 현세입자 짐이 빠진 후에는 내가 하루 종일 그 집에 앉아 길이를 재든 뭘 하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그때는 내 집인 거니까.
그제야 내가 봤던 수많은 후기 중에 '이사 전 치수 재기'가 명확하게 이해됐다. 다들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세상에 마상에 이제야 깨달음을 얻다니.
책상 구석에 잠들어 있던 줄자 하나를 찾은 나는 그날 후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의 길이를 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본가의 나의 자그마한 방의 크기와 방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들의 길이를 쟀다.
방 크기는 대량 2평 남짓? 새삼 정말 조그마한 공간에서 오래도 살았다고 생각하며 책상과 서랍장의 길이와 높이, 너비를 재서 폰에 기록했고, 그다음은 안방, 거실, 부엌으로 영역을 확장시켰다.
본가를 정복한 후에 2차 정복지는 동생 집이었다. 동생 집은 거실과 주방이 마주 보는 구조인데, 이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가 현관문을 열고 창문까지 이어지는 우리 집 구조와 비슷해서 더 가늠하기 좋았다. 물론 우리 집은 동생 집 거실 주방을 합친 것보다 작았지만.
확실히 나는 아날로그 인간이 맞는 게 그렇게 모든 걸 재고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릿속이 명료해지면서 모호하게 머릿속을 떠돌던 것들이 한데 모여 알아서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우선 필수품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 작은 집은 모든 가구가 한 개 이상의 기능을 해야 했다. 특히 나는 재택을 많이 하기 때문에 책상에 쓰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식사와 화장, 그리고 손님 대접까지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책상보단 식탁용으로 나오 제품이 나와 더 맞겠단 판단이 들었다. 얼추 비슷해 보이는 두 종류의 차이는 너비였다. 대부분 책상용보다 식탁용으로 나온 제품들이 너비가 더 넓었다. 일할 때 노트북을 밀어놓고 다이어리나 다른 자료를 봐야 할 일도 많아서 길이보다는 너비를 기준으로 제품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도 제한'이 내 안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건 가구를 한참 보러 다닐 때도 생각 못했던 문제인데, 여기저기 길이를 재고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감이 왔다. 공간이 넓은 경우라면 상관없지만 작은 공간일수록 제품의 크기만큼 높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특히 본가에는 벽을 가득 채울 만큼 큰 가구들이 많았는데, 아늑하지만 때론 답답하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었다. 여러 가족이 사는 경우에는 수납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만 혼자 사는데 그렇게 높은 가구가 필요한 일이 얼마나 될까?
작은 공간이 넓고 쾌적해 보이려면 여백이 필요했다. 나는 바닥 면적의 여백 외에도 집을 둘러봤을 때 시야에 걸리는 물건이 최대한 없도록 높이 제한을 두기로 했다. 그게 나에게 맞는 인테리어 방식이란 판단이 들었다.
높이는 붙박이 싱크대를 기준으로 잡았다.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그 높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제품들만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높이가 딱 맞는 것들만 들일 생각이었는데 너무 타이트한 기준을 잡으니 제품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져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10cm 내외의 러프한 기준을 잡았다. 대신 너비는 빡세게 기준을 정해서 최대한 딱 맞췄다.
사실 말이 거창하지 지금 이 글을 쓰다 문득 돌아본 집은 평범 그 자체다. 보통 자취생들이 많이 쓰는 물건들로만 이뤄진 평범한 자취방. 그래도 그땐 줄자 하나가 나를 구원해 준 기분이 들었다. 이 공간을 형성하는데 나름의 기준을 줄자가 만들어줬으니까.
한참 줄자에 의존할 땐 어디나 다 재고 다니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 다행히 실제로 그런 짓을 하진 않았고, 친구네 집에 갔을 때 궁금한 게 있으면 '이건 크기가 어느 정도야?'라는 질문은 했던 거 같다. '이건 얼마야?'가 아니고 '이건 크기가 어느 정도야?'라고 물어보는 사람이라니. 나한텐 가격보다 중요한 게 사이즈였으니까. 그렇게 빅데이터를 쌓았고, 여전히 쌓아가는 중이다.
재고 기록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각이 생겨서, 가구를 구매하던 시점에는 대략 상세페이지만 봐도 느낌이 왔었다. 색감도 나름대로 엄격한 기준이 있는데 이건 글이 길어지니 패스.
줄자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가구들로 1차로 집을 꾸몄고,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책상을 조금 더 큰 사이즈로 살까 고민하다가 보수적으로 접근해서 살짝 아쉽긴 한데, 나중에 집에 물건들이 더 채워질 생각을 하면 지금이 딱 맞는 사이즈 같다.
이사한 지금도 항상 가방에 줄자를 가지고 다닌다. 특히 자취생의 성지 다이소 쇼핑할 때 줄자를 잘 활용하고 있는데, 내 눈에 예뻐서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디자인을 한 번 보고, 용도를 고민하고, 딱 그곳에 놓을 사이즈가 되는지 상세 페이지를 뒤져본다. 이미 온 집안의 길이를 다 재놔서 웬만한 곳들에 대한 정보는 핸드폰 메모장에 다 잠들어 있는데, 충동구매를 하고 싶을 때면 사이즈가 절대적인 조력자가 돼서 내 충동구매를 막아주었다.
내 눈에 아무리 예쁜들 사이즈가 애매하면 둘 곳이 없으니까.
혹시 이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 나처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파악해야만 가늠이 되는 사람들.
3D 인테리어 배치로는 백날 해봐도 감이 안 온다 하는 분들은 줄자를 활용하는 걸 적극 추천한다.
작은 줄자가 적어도 나에게는 훌륭한 독립의 동반자가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