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 구할 때도 경쟁이 붙는 건데요
일요일 밤이었다. 아주아주 평범하고 평화로운 보통의 주말.
그날은 동생 부부가 조카를 데리고 집에 놀러 왔고, 온 가족이 조카의 재롱을 보느라 화기애애한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저녁 식사 후 동생 부부가 집에 가고 방 정리를 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당시 나는 평화로운 일상과 달리 전투력이 과하게 장착된 상태였다. 몇 주 전 안일한 마음으로 첫 집을 보러 갔다가 현실의 알싸함을 깨닫고 틈만 나면 부동산 어플을 들락이며 새로 올라온 매물이 있는지 살피곤 했다. 그 평화로운 주말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틈만 나면 부동산 어플을 스와이프하며 매물을 스캔했다. 주식을 도박처럼 하던 주린이 시절 때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전 국민이 삼성전자에 미쳐있던 코로나 시절 나도 코스피 3000을 외치며 하루 종일 주식창만 들여다보던 때가 있었다.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평소처럼 의자에 앉은 듯 누운 듯 기대서 습관적으로 부동산 어플을 스와이프 하던 내 눈에 못 보던 매물이 등장했다.
2000/71, 방 1, 화 1, 거 1
현 세입자가 청약 당첨으로 이사하게 되어 내놓습니다. 계약 2년. 사업자 매물(전입신고 가능)
아파트가 이 가격에? 심지어 방이 따로 있다고?
서울에서 집을 구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다. 이 가격이 얼마나 군침 도는지.
최근 몇 년 사이 전세 사기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월세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원래도 서울은 늘 집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경쟁이 붙기 시작하니 스노우볼이 굴러가는 속도가 기하급수로 빨라져서 월세 50으로는 서울에 발도 못 붙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원룸도 최소 55~60부터 시작했다.
여기에 관리비에 공과금, 생활비를 더하면 그다음은 모두가 아니까 생략.
그런데 아파트가 이 가격에? 오래된 아파트긴 하지만 위치도 좋고 세대수도 많고.
오피스텔 관리비 생각하면 비빌만한 가격 아닌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아파트야.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등장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운명을 감지하며 몸을 일으킴과 도시에 전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실례가 되는 시간대는 아닌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잡아] 이 문장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근데 이거 언제 올라온 거지? 분명 저녁 식사 전에는 없었는데?'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부동산 어플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매물은 오후 7시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후에 습관적으로 어플을 들여다봤을 때가 그즈음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이 매물이 올라온 게 길어야 30분, 1시간 안쪽일 것이란 뜻이었다.
물론 매물 소개란에 내부 사진이 하나도 없긴 했지만 괜찮았다. 집이야 가서 보면 될 일이고 귀신 나오는 집만 아니면 어떻게 다 해결하면서 살면 될 일이었다. 귀신이어도 협의를 볼 수 있다면 보면 되는 거고.
하지만 이런 일의 수순이 그러하듯, 당연하게(?) 부동산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떤 일에 꽂히면 당장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최근에 겪은 사건으로 승부욕이 과하게 장착되어 있던 상태. 심지어 상대가 바로 반응하지 않으니 내 안에서 어떤 불씨가 불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터진다 터져 도파민 불씨.
그리고 도파민과 함께 애써 꼭꼭 수납시켜 놨던 내 안에 욕망이 함께 분출하는 게 느껴졌다.
[아파트에 살고 싶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 집을 구할 땐 내가 이런 욕구를 갖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일반적인 첫 독립의 주거 형태는 빌라나 오피스텔 형태였고, 나 역시 그렇게 시작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무 여러 번 말해서 입 아프지만 돈 없고 능력 없는 프리랜서인 나는 모아둔 돈도 없고, 부모님께 자산을 물려받을 만큼 집이 넉넉하지도 않으며 당연히 신용이랄 게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리도 만무했다.
사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집에서 안 쫓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내가 아파트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한 동네에서 같이 성장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독립을 아파트로 하긴 했는데, 대부분 결혼 전까지 집에 있다가 결혼하면서 분가한 거기 때문에 나랑 상황이 다르긴 하다.
여튼 그래서 분수에 맞게 살자. 그렇게 하면서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가면 된다고 믿었는데...
집을 보다 보니 자꾸 내 안에서 스멀스멀 뭔가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파트... 아파트에 가고 싶어...!'
분명 원룸 매물을 보고 있었는데 괜히 옆에 있는 아파트 단지 월세 시세가 궁금해서 눌러보고, 쓸데없이 임장 루트에 아파트를 넣고, 서울은 비싸니 경기도와 가까운 서울 외곽까지 범위를 늘려가며(그러다 보니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거리까지 확장됐었다) 매물을 보다가 돌아오길 반복.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기웃거리는 걸까?
나는 왜 아파트에 집착하는 거지?
이 욕구는 어디서 시작된 거지?
수없이 전화를 시도하다 오늘은 연결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전화를 내려놓은 다음,
내 안의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아파트에 집착하며 도파민이 팍팍 돌아 버리면 집 구하는 데 방해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단 내 생각에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첫 번째, 내가 한평생 살아온 주거 형태가 아파트라 아파트에 익숙하다.
그리고 두 번째, 가까운 사람들이 죄다 아파트에 산다.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한 줄기의 갈대 같은 나의 성향상 이 두 가지가 콜라보로 작용해 누름돌로 내면에 자리 잡았을 확률이 높다.
일단 나는 경기도 신도시의 아파트촌에서 자랐고, 30년 넘게 이 빽빽한 아파트촌에서 살며 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네모 반듯한 건물에 들어선 수많은 가구, 몰개성 하지만 그 안에 보장되는 익명성, 네모 반듯한 도로, 아파트가 둘러싼 공원의 풍경, 상업과 주거 시설이 분리된 도시 분위기.
어디로 고갤 돌려도 아파트가 보이는 풍경 속에 사는 게 익숙하다 보니 이 익숙한 주거 형태에 자꾸 마음이 갔다. 의식하고 바꾸려 하지 않으면 사람은 익숙한 걸 따라가기 마련인 거 같다.
그리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아파트에 산다는 것도 굉장히 영향을 주었다. 나와 삶의 형태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 듣는 게 죄다 그렇다 보니 나도 그들의 삶과 벗어나지 않는 곳에 터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 말이지.
그냥 내 안에 이상한 기준이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리고 필히 이건 다양성의 부재로 벌어진 것이다.
지금이야 머리를 식히고 나니 그게 뭐라고 아파트에 그렇게 집착했나 싶지만, 어쨌든 저 조건이 굉장히 보기 드문 건 맞았고, 도파민에 싹 절여진 나로서는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머릿속에서 백날 천날 '야 너 일 끊기면 어쩌려고 그래? 그나마도 모아둔 돈 다 날리고 싶냐?' 말하면 뭐 하나 내 마음 구석에 숨어있던 본능이 듀 가나디처럼 '그래도 아파트가 좋은 걸' 하고 찡찡대면 게임 오버인 것을.
이럴 거면 독립 자체를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냐 내가 지금 이런 건 삶의 다양성이 부족해서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야 나가야 뭘 경험하고 현실을 깨닫지.
내면 속에서 혼자 온갖 생쇼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늦은 밤이 됐고,
일단은 어떻게 되든 이 매물을 봐야겠단 결론이 내려졌다.
내가 미친 건 미친 거고, 이 조건이 나한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조건이면 이 동네에서 매물 보던 사람들은 군침을 흘릴만했다.
그렇다면? 내가 빠질 수 없지. 재밌잖아.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내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아침 일찍 부동산 앞에 가서 서있을까? 부동산 사장님이 무서워하려나?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건 다음 날 아침 8시부터 다시 전화 연결 시도하기 했다.
심지어 그날 오후에는 전화 인터뷰에 다음날 회의 때 가져갈 회의 페이퍼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오전 안에 모든 걸 결판 봐야 했다.
타임어택까지 걸리니 더 짜릿하다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원래 도파민이 돌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팽팽 돌면서 잠이 안 오기 마련 아닌가.
이미 내 머릿속에는 평행우주처럼 전화 거는 나, 그 집을 보는 나, 계약을 하는 나,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삶을 시작하는 나, 관리비의 압박에 머리를 쥐어뜯고 생활비를 줄이려고 고군분투하는 나, 일자리가 끊겨서 오후타임 쿠팡 알바를 가려고 차에 타는 나, 물건을 싣고 나르는 내가 동시에 보였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내일 부동산과 처음 연결되는 사람이 나여라. 제발.
그렇게 억지로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리고 결전의 날 아침.
그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 비장하게 시계를 노려봤다.
오전 8시는 아무리 그래도 실례가 아닌가 싶었지만, 혹시나 누군가가 일찍 전화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집을 본다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이미 전화 목록은 부동산 번호가 주르륵 채워져 있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끊고 다시 걸기를 반복했다.
한 한 시간 반 정도 시도했었나? 전화를 걸고 걸고 또 걸어도 연결은 되지 않았다.
익숙한 신호음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어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근성 없는 면이 이런 부분에서도 발휘될 줄이야. 평소에 근성 좀 키울걸.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내면의 갈등을 느끼던 나는, 이 모든 원인이 카페인 부족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몇 시간째 커피 한 잔 못 마신 상태는 카페인 중독자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커피 한 잔 타고 간단히 아침 먹을 거만 챙겨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 남짓, 후딱 할 일 하고 다시 전화를 걸자는 마음으로 부엌에 가서 커피를 타고 전날 먹다 남은 과일을 챙겨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익숙한 통화음과 달리 지금까지와 다른 소리가 내 고막을 때렸다.
[지금 통화 중이오니 잠시 뒤 다시 걸어주세요]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에서 어떤 신호가 감지됐다. 눈앞에서 기회를 놓치며 다른 이들의 성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며 쌓아온 나의 빅데이터. 10대 때부터 아이돌 덕질, 사회생활을 거치며 켜켜이 쌓아온 내 본능.
절대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그 감각.
망했다
그 잠깐 사이에 누가 연결됐구나.
5분 전과 달라진 통화 연결음은 나에게 절망을 주기 충분했고, 지난밤부터 이어져온 도파민은 빠르게 휘발되며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내게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은 습관적으로 계속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통화가 길어지는지 잠시 뒤에 다시 연락 달라는 메시지만 반복됐다.
도파민에 절여져 있다가 망한 걸 직감한 직후의 그 알싸함이란.. 도파민 중독과는 또 다른 중독성이 있다. 나는 통화 시도를 거듭하며 나의 망했음을 온몸으로 맞았고, 내 눈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평행우주는 하나하나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유노윤호가 그러지 않았는가. 일희일비하지 않기.
그의 큰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 죄로 나는 일희일비의 화신이 되어 그 후로 30분 동안 더 통화 연결을 시도했고, 전화를 걸기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겨우 부동산과의 연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쯤 되니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가 응답을 해준다는 것 자체로 기뻐져서, 나는 일할 때만 발휘되는 사회성을 최대한 쥐어짜 어제 올라온 부동산 매물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개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젯밤부터 그 매물 때문에 전화가 너무 와서 힘들어요. 이제 전화 뽑아 놓으려고요."
"아 진짜요? 누가 집 보기로 했어요? 제가 몇 번 째예요?"
"아가씨가 두 번째야. 좀 전에 다른 아가씨가 집 보기로 약속 잡았어요."
역시 내 감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아니 근데 그건 그렇고 이 기회를 이렇게 날려?
어젯밤부터 이 집 때문에 도파민에 절여져서 잠도 못 자고 아침부터 전화 시도하느라 정신없었는데?
먼저 연결됐다는 사람이 집 보면 바로 계약한다고 할 거 같은데 어떡하지?
"사장님 저 집 안 보고 계약할게요.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세상에, 집을 보자마자 계약 결정하는 사람들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놀란 게 엊그제인데
지금 집을 안 보고 계약하겠다는 소리가 나온다고?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도파민이 사람을 이렇게 돌게 만들 수가 있나? 아무리 아파트 무새여도 이건 좀 심한데.
네가 잠깐 자리 비운 사리에 누가 연결됐으면 그건 그 사람거인 거야. 애초에 네 거가 아닌 거에 미련을 가지고 덤벼들면 어떡하니. 집 구하다 머리가 돌았구나. 얘야 정신 차리렴. 근데 내가 살고 싶어. 뺏기기 싫다고!!!
도파민에 절여지는 걸 넘어 집착으로 바뀐 스스로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다.
다행인 건 이걸 입 밖으로 표현하자마자 뭔가 정신인이 차려지는 느낌이 나서 소리가 나지 않게 내 입을 매우 쳤다. 이래서 밖으로 표현할 때만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거구나.
아파트를 강렬하게 원하면서도, 스스로도 그게 정답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이 그래도 집을 안 보고 계약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이렇게 중간에 가져가는 건 먼저 약속한 분한테 예의가 아니에요. 대신 아가씨가 두 번째니까 첫 번째 본 분이 계약 안 하겠다고 하면 꼭 전화할게."
정말 내가 다른 운은 없어도 인복이 있긴 하다.
내 정신 나간 딜에 중개사 분은 동조하지 않았고 바로 아니라고 잡아주었다. 그 너털웃음에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고, 꼭 다시 연락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와중에도 첫 번째로 집 보기로 한 분이 언제로 약속을 잡았는지, 내가 두 번째가 맞는지, 비슷한 매물은 없는지 확인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진짜 첫 번째 사람이 집 본 후에 다시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를 도파민 악령으로 만들었던 그 매물은 첫 번째 분에게 넘어갔다.
내 전화에 중개사 분은 또 웃었고, 그분이 집을 보자마자 바로 계약 의사를 밝히고 가계약금을 넣었다며, 좋은 매물 있으면 다시 연락 주겠다고 나를 위로했다.
매물을 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두 번째 경험이었다.
물론 내가 독립을 늦게 해서 또래에 비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열등감이 있으니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건 좋은데, 애석하게도 당시의 나는 그것에 감사할 만큼 여유롭지도 지혜롭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집 다 그저 내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 건데,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나에게는 이상한 생각이 강화됐다.
[괜찮은 집은 첫 번째로 보는 거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그러니 일 번이 돼야 해]
첫 번째는 그럴듯한데, 두 번째에서 이상한 논리 점프가 이어진 느낌...
하지만 그땐 이걸 굳게 믿었고 눈에 뭐가 씌인 사람처럼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에 몇 곳씩 돌아다닐 때도 있고 경쟁자(?)와 함께 집을 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약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곳이 없었다.
앞선 두 사건에서 너무 도파민을 불태워버린 걸까.
내부도 못 본 집에는 꽂혀서 내가 계약하게 해달라고 했으면, 왜 정작 집을 보러 가서는 '아 괜찮네'하고 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첫 집으로 무난하게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집 구하기는 진짜 내 삶의 터전을 찾는다기 보단 운명론에 가까운 도파민 채우기였던 거 같다.
내가 이곳에서 살게 됐을 때 나의 삶이 어떨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보다는,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쟁취하고 싶단 이상 욕구가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아니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운명처럼 집을 만나게 된다던지.
뭐가 됐던 지간에 정상적인 집 구하기와는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란 건 우리 조카도 알 거 같다.
'내가 일등이 될 거야' '경쟁에서 이기겠어'
상대가 없는데 혼자 쉐도우 복싱을 하며 부동산 어플을 탐방하고 집을 보러 다녔고, 당연히 어떠한 진전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 사이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집을 구하던 후배는 착실하게 원하는 집을 찾아 이사했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 '그래서 너는 언제 이사해?'란 말을 듣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아 얄궂은 운명이여.
현실만 빨리 알았어도 이렇게 쇼하며 나만 남진 않았을 텐데.
내가 삽질하는 사이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됐다.
그냥 봄이 아니라 꽃이 만개하고 질 준비를 하는 늦봄.
그리고 봄이 지나가는 걸 온몸으로 느낄 때쯤 나는 느꼈다.
'진짜 망했다. 나 이러다 올해 집에서 못 나온다'
공포가 사람을 지배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듯, 도파민과 엿 바꿔 먹은 위기감이 다시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무서워져서 다시 집을 보러 다녔고,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싸고 보안도 약하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홀랑 넘어가서 계약의 문턱까지 왔다가 결국 이성을 붙잡고 탈출하기도 했다.
(그땐 뭐에 씌었는지 세면대도 없는 화장실을 보며 '세면대 내 돈 주고 달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집 보러 다니는 거, 아니 정확히는 '독립하려고 알아보는 나'에 취해 있는 건가?
내가 지금 집을 고르러 다니면서 구경하는 거로 도파민을 채우고 있는 건가?
이걸 어쩌면 좋지 하던 찰나, 우연히 또 한 매물이 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지막 출근 날 덜컥 회사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에 계약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어플에서 본 그 집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