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비싼 쇼핑인데 5분 만에 결정하라구요?

[다른 의미로] 운명의 집을 만난 썰

by 심미금


작년 말과 올해 초는 임장과 일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했던 프로그램의 시즌2가 결정됐고 바로 이어서 일을 하게 돼서 그 일을 하면서 서울 곳곳을 다닐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동네 위주로 부동산 어플에 올라온 매물들을 살펴보면서 서서히 집 구하는 일을 구체화시켰다. 많진 않지만 그 사이에 LH, SH, GH, HUG에 올라온 공고도 살펴봤고.


이쯤 되면 궁금한 분도 있을 거 같다.

'어차피 임장 하는 거 집도 같이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일을 두 번하지?'


좋은 집을 판단할 능력은 부족해 보이지만 그거야 경험해야 채워지는 부분이고

본 집을 무조건 다 계약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임장 간 거 한 두 집 정도 보고 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게 더 데이터 베이스 구축에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맞다. 굉장히 합리적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걸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의 멍청함에 여러 번 놀라고 있는데,

이왕 고해 성사하기로 했으니까.

당시 나는 내가 독립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질 줄 알았다.

그때 나의 메커니즘은 이러했다.



1. 임장을 다니며 내가 살 동네를 오랫동안 공들여 고른다
2. 마음의 드는 동네를 위주로 부동산 어플을 또 심사숙고한다
3. 어느 날 우연히 운명의 집을 만난다
4. 연락한 날 바로 운명의 집을 보러 간다 (*바로가 포인트다)
5. 그 집에 들어선 순간 강한 운명의 기운이 나를 감싸며 나는 외친다
"저는 이 집을 선택하겠습니다!!!"
6. 그 집은 내 거가 되고 나는 행복한 자취 라이프를 시작한다.



한 마디로 집이 나를 기다려 줄 거라 착각한 거다.


집이 나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되면 되면 안 되면 말지라는 가벼운 마음을 집을 보러 간다?

부동산 중개사랑 현 세입자가 시간까지 내줬는데? 오우 노우. 절대 불가.

아마 내가 어플을 보다가 전화해야겠단 마음이 드는 집이 보인다면, 그건 그 자체로 그 집과 내가 운명인 걸 거야. 뭐 이런 굉장히 운명론적인 생각을 했었더랬다.


물론 내 예산이 좀 좁고, 기준이 많긴 한데, 그래도 내가 하겠다는데 그렇게 되겠지.

새 집은 월넛에 딥그린, 빈티지풍이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꾸며야지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이건 나에게 가르침을 준 운명의 집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처음으로 본 집은 당시 일하던 회사 바로 앞에 있던 오피스텔이었다. 그 동네에 방송 제작사가 많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자주 왕래했던 곳이었고, 주거단지와 상업단지가 적절히 섞인 평화로운 동네였다.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출근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건 물론이었고, 그 동네에서 술을 마실 때 오피스텔 1층 상가에 가거나 뒷골목을 전전했기 때문에 나름 내적 친밀감이 있는 건물이었다.

그래서 회의 중간 쉬는 시간에 어플에 들어갔다가 매물이 뜬 걸 본 순간 '여기서 살면 놀기 편하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름 인지부조화를 견뎌가며 스스로와의 합의 끝에 집 구하기 리스트를 축소하긴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간사하지 않은가. 내 거가 아닌 걸 알더라도 비싸고 좋은 물건을 보면 순간 혹하듯이 부동산 매물에 있는 온갖 좋은 매물들(위치, 방 개수, 구조가 완벽하고 가격이 어마어마한 녀석들)을 보며 욕망이 들끓고 있던 지라 '그래 원룸은 아니어도 잘 공간은 분리되면 좋지'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매물은 작은 방이 딸린 1.5룸 복층이었다.


복층은 살기 불편할 거 같아서 오히려 기피하고 있었지만 일단 방이 하나 더 딸려 있는 상태면 플러스 공간이 생겨서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예상보다 가격이 좀 더 있긴 한데,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회의가 다시 시작됐고 나는 잠시 그 매물을 잊고 일에 집중했다.


...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 매물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오피스텔에 매물이 뜬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그 집을 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앗 설마 이게 그 운명의 징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쾅쾅 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부동산에 전화를 해야만 할 거 같았고 이 매물을 놓치면 안 될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날 회의의 주된 안건은 다른 촬영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주 참여자가 아니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차라리 빨리 결정을 하고 일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고 회의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은 중개사는 오늘은 집을 볼 수 없으니 다음날 12시에 부동산에 오라고 했다.

생애 처음 집 볼 약속을 잡고 나니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폭발해서 그날 회의 내내 내 귀 양쪽에서 북과 꽹과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근래 맛보기 힘들었던 최고의 도파민이었달까. 보통 너무 흥분하고 설레면 무슨 사달이 나던데, 설마 그런 일이 있겠냔 생각으로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걱정을 사뿐히 무시하고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는 동안에 그 매물을 다시 보려고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매물이 내려가 있었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 구조를 떠올리며 1층에 있는 방에 침대를 두는 게 나을지 복층으로 매트리스를 올리는 게 나을지를 고민하며 오늘의 집 어플을 미친 듯이 돌려봤다. [너네 집들이 올 준비해라] 친구들에게 쓸데없는 카톡도 하면서 말이다.


다음날 아침 평소의 출근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나는 집을 나섰다. 방송가의 회의 불문율이 오후 1시 이후라 12시 약속이면 평소보다 적어도 한 시간은 빠르게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주 앞뒤로 촬영이 몰려 있었고 다른 회의도 있어서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에 회사 앞까지 가야 하는 게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내 집을 보러 가는데 그게 대수랴. 운명을 만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12시 약속보다 조금 이른 11시 45분에 맞춰 부동산을 찾아갔다.

이미 전날 퇴근하며 부동산 위치까지 사전 답사를 마친 지라(이런 쓸데없는 부분에만 철두철미하다)

부동산을 찾아가 문을 여니 중개사 한 분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떤 일로 오셨어?"

"저 오늘 12시에 집 보기로 했는데요."

"약속하고 오셨어요? 그 집 방금 계약하기로 했는데?"


방금 계약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상황파악이 안 됐다.


내가 얼빠진 포정으로 '저 12시에 약속하고 왔는데요?'를 반복하니, 뭔가 문제가 생긴 건지 중개사는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이야기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지금 사무실에 있던 분은 어제 나와 약속을 잡은 중개사가 아닌 듯했고 통화 내용을 얼추 들어보니 나와 통화한 분은 그 매물을 보러 가있다고 했다. 계약하기로 했다는 손님과 함께.


서울로 오는 동안 나름 많은 걸 준비했었다. 설레기도 하지만 집을 보는 건 처음이라 긴장돼서 집 볼 때 봐야 한다는 리스트를 찾아 읽고 또 읽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었다.

막상 갔는데 집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중개사가 까칠할 수도 있고, 현세입자가 자신의 집을 자세히 둘러보는 걸 불편해할 수도 있고, 하다 못해 1층 상가에 불이 나서 대피하느라 집을 못 보는 상황까지 다 생각해 봤는데, 정작 [내 앞사람이 계약하기로 해서 집을 못 본다]는 상황은 내 시뮬레이션 속에 없었다.


부동산을 보겠다고 약속을 잡았는데, 보지도 못하고 계약이 불발될 수도 있어?

아니 약속을 잡았으면 일단 집을 볼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문득 지난해 여름 동생이 지금 사는 집을 구매했을 때가 생각났다. 잠깐 매물 하나 보고 오겠다고 조카를 맡겨두고 가더니 그날 바로 가계약을 쓰고 와서 온 가족을 경악시켰던 일이 있었다. 매매를 그날 결정하는 사람이 어딨 냐는 내 반응에 동생 부부는 집이 괜찮고 예산안에 들어오고 다른 경쟁자들도 있어서 바로 계약하기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었다.


동생네 부부의 매매 상황의 문장 구조를 뜯어보면 이렇다.



[한 집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다]
[바로 계약의사를 밝힐 수도/아닐 수도 있다]
[계약의사를 밝히는 건 선착순이다]



근데 나는 앞 상황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집이 마음에 들어 바로 그날 계약했다]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게 나한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집을 구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예제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 집이 문의가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매물 올렸다가 한 시간 만에 내렸거든요. 혹시 앞에 다른 분이 약속되어 있어서 바로 계약할 수 있단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아 네..."

"아이참 어쩐다. 혹시 여기만 보고 있어요? 원하는 조건이 어떻게 되세요 볼 수 있는 집이 있나 찾아볼게요."



부동산에 연락할 때 다른 사람들도 약속을 잡았는지, 내 앞에 몇 명이 보는지도 확인해야 하는 거구나.

아니, 근데 어젠 집을 못 본다고 했으니까 오늘 집을 본 걸 텐데 이렇게 보자마자 바로 결정을 내린다고?

아무리 원룸이라도 그렇지? 그런 자신감과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

제대로 확인 안 한 내가 바보긴 한데, 이건 자취남이나 부동산 관련 유튜브를 봐도 잘 안 나오는 내용이라고!

와 쉬는 날 회사 앞까지 온 건데 이대로 다시 한 시간 반 걸려서 집에 가야 한다고? 아무 소득 없이?


스스로의 멍청함과 현실의 냉철함, 다른 사람들의 결단력에 놀라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을 때쯤

부동산으로 나와 통화했던 중개사와 고객이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또 다른 혼돈이었다. 중개사들은 서로 왜 고지를 제대로 안 했냐 고객 약속 왜 공유 안 하냐 다음에 또 오는 사람 있으면 바로 전화부터 해라 하며 싸우기 바쁘고 집을 보고 온 고객은 자신이 본 집에 경쟁자가 많은 걸 체감했는지 지금 바로 가계약금 넣고 가겠다고 하고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고.

그 와중에 나랑 통화한 중개사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다른 고객한테 오지 말란 전화 후 바로 가계약을 진행했고 다른 중개사도 마땅한 매물이 없었는지 전입신고 안 되는 집이 있는데 볼 생각 있냐며, 신고만 안 되지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영업을 계속했다.


앞서 이야기 안 한 게 있는데 집을 보겠다는 나의 모든 기준에 가장 상위는 [전입신고 되는 집]이었다.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선 화를 안 내는데 그때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가 나중엔 체념 단계에 들어서서 '문제가 생기면 제 책임이잖아요 싫어요'란 말을 하며 그 부동산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부동산을 나서면 부동산도 나도 서로 얻을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누가 악의를 가지고 잘못한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의 문제였던 것뿐인데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고 여기서 화를 내고 부동산을 나서면 나는 이번 주의 유일한 휴무일을 시간만 쓰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그렇지만 볼만한 매물도 없고 여기서 계약을 하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뭐라도 얻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계약 안 되는 건 알겠구요. 시간 내서 왔는데 원래 보기로 했던 집 구경만 하면 안 되나요?"



집을 본다고 다 계약하는 건 아니잖아? 이미 다른 사람이 계약하기로 한 거 알겠으니, 원래 목적대로 부동산에선 나한테 집을 보여주고 나도 집을 보면 서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이 먹은 게 허투는 아니다. 옛날 같았음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와서 속상해 ㅠㅠ 이러고 낮술이나 땡겼을 텐데 침착하게 내 이익을 챙길 줄도 알게 되다니.

이러면 부동산에서도 나한테 집을 보여주긴 했으니 좀 나을 거고. 뭐 내부의 소통 문제는 본인들이 해결할 문제지만.



내 제안에 중개사는 바로 현세입자에게 전화해 한 명이 더 집을 보러 갈 거라고 연락했고, 나는 중개사와 함께 '내 집이 됐을 수도 있는' 오피스텔을 구경하러 갈 수 있었다.


호기롭게 집을 보겠다고 하긴 했지만, 집을 보러 가는 길에 또 긴장돼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심지어 현세입자와 중개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집을 보려니 뚝딱이가 된 느낌이라 최대한 긴장한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아마 엄청 티 났을 거다) 복도에 붙은 방을 보고 화장실과 싱크대 수도를 켜보고 복층을 반만 올라 빼꼼 구경하는 것으로 집 보기를 마쳤다. 어찌나 빨랐던지 현세입자가 오히려 다 본 게 맞냐고 되물었던 게 기억난다. 다른 사람들은 뭘 더 보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거 같아서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후다닥 집을 벗어났다.



집을 보고 나온 후 중개사와 인사를 한 후 헤어진 나는 근처 김치찌개 집으로 향했다.

부동산에 가서 집을 보고 근처에 있는 나만의 김치찌개 맛집에서 참치김치찌개를 먹는다가 오늘 나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그 사이 문제가 있긴 했지만 다행히 서울로 올라오면서 생각했던 모든 미션들을 수행할 수 있었고, 찐한 참치김치찌개를 먹으며 잠시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원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면 당황하기 마련이고, 특히 온갖 플랜을 다 짰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튀어나올 때 가장 멘탈에 타격을 받는 법.

참치김치찌개를 먹는 내내 나는 '세상 호락호락하지 않아 무섭다'는 말만 되뇌었던 거 같다.


그래도 좌절만 하지 않고 마지막에 집을 보여달라고 한 기지에는 스스로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별 거 아닌 일이라도 좌절만 하기보단 그 안에서 칭찬할 건 칭찬하고 과오는 인정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니까.


여러 모로 그 집이 나에게 [운명의 집]은 맞았던 것 같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계약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헛된 망상이었음을 깨닫게 해 줬으니까.

집을 구하려는 사람은 많고 집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그래서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근데 나는 경험이 없어서 나한테 맞는 집이 뭔지 알 수가 없잖아.

지금 그 경험을 쌓겠다고 시도 중인 건데, 그나마 이걸 빠르게 상쇄시키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고민하던 나는 부동산 어플을 켜서 주변 매물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 딱 들어맞는]이라는 생각만 좀 버리면 세상은 넓고 매물은 많았다. 이 매물들을 좀 다양하게 둘러보면서 간접 경험을 하면 감각이 좀 생기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몇 억짜리 아파트를 볼 건 아니니까.


경험보다 더한 스승은 없단 생각이 들었고, 또 언제 어디서 운명을 만날지 모르는 법이기 때문에 나는 예산의 기준을 조금 수정하고 괜찮아 보이는 매물에 바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리면 예산을 수정했어도 내가 그 집이 마음에 들었을 때 계약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집, 즉 계약할 가능성이 있는 집들을 봤다는 뜻이다. 그전에는 재고 따지면서 10가지 중 하나만 수틀려도 안 봤다면 지금은 10개 중 2~3개가 안 맞아 보여도 나머지가 괜찮으면 바로 컨택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평일 낮에 집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몇 개나 되나 싶지만, 다행히 몇 번의 시도 끝에 15분 거리의 한 집에서 한 시간 뒤에 집을 볼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 바로 달려가 그 집을 봤다.


원래 첫 한 걸음 떼는 게 무섭지 일단 시작하면 두 번째는 훨씬 쉬운 법.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운명의 집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때부터는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부동산 어플에서 보고 바로 전화해 약속을 잡고 집을 보러 다녔다.


집 형태도 아파트 외에는 살아본 경험이 없으니 일부러 빌라부터 다가구, 오피스텔, 아파트까지 다양한 형태의 집을 보러 다녔다. 집을 볼 땐 집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전후로 주변을 걸어 다니며 동네 분위기를 보고 편의 시설 위치를 확인하고 어플로 자주 가는 곳들을 찍어보며 교통이 어떤지 체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야 하니까.


사실 그전까지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부동산 볼 때 꼭 확인할 리스트]를 맹신했다.

그거에 더해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는 기준까지 더하고 나니 어느새 리스트가 너무 많아졌고, 현재 내 능력으로는 짧은 시간 안에 그것들을 다 확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렵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아무리 나를 위한 조언이어도 내 능력 범위를 넘어가면 잔소리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기준이 전혀 없다 보니 조언이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혼자 삐질 때가 많아졌고, 그걸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보고 나름 기준을 만들어서 결정하는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아 너의 기준은 A야? 나는 집을 보다 보니 A도 좋지만 B가 더 중요하더라고'

이런 대화가 가능해야 건강한 대화인 거다.

아놔 그걸 이제야 이 나이가 되어도 어렵게 깨닫고 있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첫 집이 나에게 많은 걸 알려줬다는 점이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면 네가 원하는 집은 못 구해~ 정신 차리고 기준을 잡고 민첩하게 움직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그 집이 나를 부른 거 같았다.


운명의 집아 땡큐 하다...

그때가 늦겨울이었으니 아마 그때 계약하신 분은 이미 몇 달째 그 집에 살고 계실 텐데 잘 살고 계실는지...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사실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집 분위기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내심 안심한 것도 있었다. 앞에 그런 상황이 없었으면 '시간 내주셔서 죄송한데 일단 계약할까?'하고 얼레벌레했을 수도 있으니까.


네 정신 승리 맞아요... 저는 워낙 마음이 갈대 같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정신 승리를 해줘야만 한답니다.

아무튼 그렇게 갈대 같은 마음이 이리저리 휘날리다 휩쓸려가지 않게 뿌리를 붙잡아 가며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내가 몇 년간 독립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부동산 어플을 볼 때 보다, 한 겨울에 임장을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치를 주었다.


그래서 집을 구하는 경험이 수월했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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