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보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낙천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산소미포함이라는 게임이 있다.
미지의 소행성에 불시착한 후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자원을 이용하고 기술을 습득해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고 마지막에는 우주선을 만들어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게임이다. 나름 과학적 지식과 전략을 요하는 게임인데, 꽤 재밌어서 몇 년째 즐겨하는 게임이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계속 게임을 한 건 아니고, 열심히 게임을 하다가 질리면 잊고 있다가 또 몇 달 뒤에 생각나면 다시 게임을 하는 식으로 몇 년을 보냈다. 그렇다 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엔딩은 못 봤다. 한참 시간이 많고 열정이 불타오를 때는 새벽까지 공략을 찾아보고 연구하며 열심히 게임을 하지만, 몇 번 실패하다 보면 빠르게 흥미가 식어버린다. 앉아서 끈질기게 될 때까지 하지 못하는 내 지구력 덕분에 나와 함께 소행성에 도착했던 수많은 복제체들은(게임에 나오는 생존자 캐릭터를 부르는 명칭) 단 한 번도 우주선을 타고 탈출해본 적이 없다. 엔딩을 보겠다는 꿈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기 때문에 우주선을 타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엔딩도 못 보는 게임이 뭐가 재밌냐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게임을 좋아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내가 떠날 소행성을 고르고, 최초의 복제체 3명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복제체들은 기술과 장점,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캐릭터와 조합으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이번에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게임을 시작할 때만큼은 항상 엔딩을 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에 신중하게 캐릭터를 고르고 골라 소행성에 불시착한다.
게임이 시작되면 화면 속에 움직이는 작은 데이터들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뜬다. [새로운 희망]
그리고 나는 이 [새로운 희망]이란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희망을 싫어할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냥 희망도 아니고 새로운 희망이 주는 느낌은 조금 다르다. [새로운 희망]이 뜰 때만큼은 이제 막 소행성에 도착한 복제체들처럼 나 역시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에 부푼다. 이번에는 꽤 멋진 소행성 기지를 짓고 잘하면 우주선을 쏘아 올려 엔딩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과의 벽(?)에 부딪치며 사라질 희망이지만, 이 친절한 게임은 다정하게도 능력치가 부족한 게이머가 몇 번 새로운 게임을 하든 늘 똑같은 희망을 부여해준다. 이번엔 잘 될 거야.
그리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원도 부족해지고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기 때문에 기지와 복제체들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 매번 정화를 하고 다음 기술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내 능력치는 한계가 있으니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 보면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다다르고 (대부분 무계획 문어발식 개발을 하다가 돌이킬 수 없게 오염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을 즈음에는 자신의 바보 같음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내가 이 정도로 바보였다니'하고 10356번째 놀라며 더 이상 수습할 수 없게 된, 아니 내가 수습을 포기한 행성을 버리고 새 게임을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다시 복제체를 고르고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고 나면 화면을 둘러보며 개발 계획을 짠다. 그리고 바보 같게도 10357번째 [새로운 희망]을 보면 처음 보는 것처럼 행복감에 차오른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몇 년. 엔딩을 못 볼 게 확실한 게임을 수없이 반복하며 놀던 어느 새벽,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나는 [새로운 희망]에 중독된 거구나. 애초에 끝까지 가볼 생각 없이 적당히 하다가 새 게임이 주는 희망에 또 중독될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그도 그럴 것이 게임에서 보이는 패턴은 내가 일상 속에서 일할 때 보이는 패턴과 매우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고 새로운 일을 항상 찾아다닌다. 인맥 중심 사회라 모든 일자리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보여지는 일자리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리고 나는 내 눈앞에 보이는 몇 개 안 되는 선택지 중에 최선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신중하게 새로고침을 한다. 그렇게 어렵게 새로운 일을 구하고 나면 [새로운 희망]을 띄운 복제체 상태가 된다.
'이번 프로그램은 잘됐으면 좋겠다.'
'새 작가님들이 너무 좋네? 이 프로그램은 분명 잘 될 거야!'
'열심히 해서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야지!'
게임에서 [새로운 희망] 사기는 3일간 유지된다. 게임 초반에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환경도 되어 있지 않지만, 이 희망 하나로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며 황무지 같은 게임 내 환경을 열심히 개발한다. 그리고 현실의 나도 희망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일한다.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벽에 부딪치면서도 잘될 것 같단 희망 하나로 즐겁게 일한다.
하지만 희망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하물며 [새로운]이 붙으면 오래 유지되기란 어렵다. 게임상에서는 3일이 지나면 [새로운 희망] 사기가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부분은 환경을 개선해주는 방식으로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나 역시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채워 넣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게임과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게임이야 공략을 찾아보고 몇 번의 리게임을 통해 익숙해지면 사기를 채워 넣는 공식을 알게 되지만, 현실의 나에게 사기를 채워 넣는 일이란 너무 변수가 많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진행될수록 더 잘될 것 같단 희망이 생기지만, 10년 넘게 일해본 결과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바빠지고 스케줄은 불규칙해지기 때문에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채워 넣는 것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제일 쉽게 채워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맛있는 걸 먹는 것인데, 음식은 몇 달 후 살이라는 새로운 디버프가 돼서 돌아와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당장 상황을 모면할 순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일이 더 꼬이기 시작한다. 게임에서는 주로 내가 자신 있게 게임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시점인데, 오염 구역을 탐사한다거나 자원 부족의 문제를 재빠르게 대처할 수 없어지는 때이다. 어떻게 보면 전략 시뮬레이션의 꽃(?)인 전략을 본격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타이밍인데 그 정도 머리는 안 되니, 아니 정확히 말해 게임에 그 정도로 머리를 쓰고 싶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흥미가 줄어들게 된다.
현실에서는 두 번째 촬영을 끝냈을 즈음 이런 위기가 찾아온다. 촬영을 해보면 소위 말해 각이 보인다. 좋은 점도 보이지만 문제점, 고쳐야 할 점도 보이기 마련인데, 팀 전체 분위기상 의논해서 고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좀 낫지만 보통 촬영이 시작하고 나면 방송 준비와 촬영 준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제작진이 인력난에 시달린다. 눈앞에 있는 촬영과 방송을 만들어 내기에 급급한데 문제점을 논의하고 보완하자는 이야기는 꿈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새로운 희망이 사라지고 기지가 망가지기 시작하고 게임을 더 이상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을 때 즈음이면(보통 새벽이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현실에서는 첫 방송이 나갈 즈음인데, '왠지 이번에도 안 될 것 같다'는 불안이 점점 현실화되는 시점이다.
게임은 안 풀리면 새 게임을 쉽게 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 부풀었던 새로운 희망을 아주 납작하고 납작하게 접어서 마음 아래로 가라앉힌다. 그 밑으로는 얼마나 많은 수많은 희망들이 깔려있을까.
그나마 게임 속 복제체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속에 가라앉은 새로운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희망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제 수명을 다한 새로운 희망은 다른 형태로 모양을 바꾼다. [일말의 희망]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언제라고 콕 짚어서 말할 순 없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전환의 순간이 온다.
사실 방송 일은 첫 뚜껑을 여는 순간 성공과 실패가 보인다. 정말 잔인하게도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대중에 공개됨과 동시에 성공과 실패가 확연하게 보인다. 그다음부터는 이미 정해진 엔딩을 따라가는 것에 지나지 않다. 내 노력과 관계없이 선택받지 못한, 실패의 길을 걷는 것은 굉장히 고역이다. 하지만 하나의 목표를 보고 같이 일해온 동료들, 어딘가에 몇 명은 있을 재밌게 보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해 엔딩을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들었을 때 잊혔던 새로운 희망은 일말의 희망으로 바뀐다.
'아직 괜찮아' '이번에 잘 마무리하면 다음은 더 잘 될 거야' '내가 즐거웠음 됐지' '이것도 다 도움이 될 거야'
일말의 희망이 발현되는 시기에 따라 종류도 다양한데, 나 자신을 위로하는 용도가 가장 많다. 아직 가야 할 길은 길고, 한 번 방송이 시작됐으면 큰 논란 없이 무사히 잘 원래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되는 게 가장 베스트다.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는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어도 내가 잘만 하면 큰 탈도 없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TV에 나오는 수많은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무사히 잘 끝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가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나를 위로할 최고의 문장을 찾는다. 어렵게 찾은 일말의 희망은 보통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유효하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다음 일까지 공백기가 생기는데, 이때는 희망의 공백기로 둔다. 특별히 새로운 희망도, 멘털이 터지지 않게 버티게 해주는 일말의 희망도 없는 노 희망존. 기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살며 다음 일을 숨죽여 기다린다.
일이 원할 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희망 중독자에게 노 희망존을 버티는 건 고역과도 같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게임을 하며 새로운 희망을 계속 찾는다. 일의 공백기마다 내가 게임 중독처럼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 이유다.
이쯤 되면 [새로운 희망] 중독이란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혹은 그냥 [희망 중독]
더 좋은 상황, 더 좋은 선택지가 나오지 않을까, 내 인생이 여기까지 일리 없어하는 다양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게임에서 습관적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리셋을 누르고 또 누르는 것이다. 대충 다음에 어떤 프로그램을 하게 되든 결말은 똑같은 것 같으니, 게임에서라도 희망을 찾고 원하는 걸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을 찾아 헤맨다.
현실에서 희망의 모습을 바꿔가며 참고 참은 만큼 게임에서는 참을성이 더 빠르게 휘발된다. 조금 어렵고 조금 부딪치면 미련 없이 새로운 게임을 누르고 새 희망을 찾는다. 현실에서 수많은 엔딩을 봤음에도 게임에선 한 번도 엔딩을 보지 못한 건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이 10년 넘게 반복되다 보니 요즘에는 새로운 희망도, 일말의 희망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희망을 갖고 일하고 금방 절망하고 억지로 작은 희망을 붙잡고 끝을 보는 상황을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희망 중독이 나를 옥죄는 느낌마저 든다. 희망이 컸던 만큼 실망은 더 커지고 일말의 희망이 방어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고, 무엇보다 참을성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연차가 쌓이고 나이가 들수록 현실의 나는 참을 일이 더 많아지는데 일 외적인 부분의 나는 참을성이 더 줄어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인생은 공략집도 없고 치트키도 없는데, 항상 비슷비슷 고만고만한 데 머물러있는 나의 능력치는 여기까지가 아닐까? 더 좋은 엔딩을 볼 수 있는데 거기까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능력치가 여기까지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하더니. 잘 되고 싶다는 희망 하나로 열심히 일했더니 그 희망이 나를 덮치는 큰 파도가 되어 돌아오다니. 내가 그간 수없이 만들고 버려서 우주에 가진 못한 복제체들이 복수하는 것일까. 미안하다 얘들아 사실 나는 너희를 우주에 태워 보낼 능력이 없었어. 이번엔 성공할 것처럼 사기 치면서 데려와놓고 방치해서 미안해. 그런데 나도 이번엔 진짜 잘해보고 싶었어.
참을성이 부족해졌다는 걸 인지한 후로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생각을 미루고 움직이려고 한다. 한때 새로운 희망과 일말의 희망이 자리 잡았다가 가라앉고 나서 생긴 빈자리에 게임 외에 것들을 채우고 있다.
운동을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고, 새로운 취미를 배워보고, 엄마와 탄수화물을 채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런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다며 작은 소망을 키워본다.
도저히 정답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10년을 열심히 살아봤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조차 마음 한쪽에는 '이번엔 혹시 몰라''어떤 행운이 찾아올지 모르잖아'하는 작은 희망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레이더를 보낸다.
그렇게 수없이 새로운 희망을 찾더니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게 아예 내재화된 것 같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희망이 진짜 희망이 될 때까지 움직이면 되니까.
이 노선이 아니더라도 움직이다 보면 다른 노선이라도, 새로운 희망이 아니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희망이 없다면 소망이라도 얻을 수 있겠지.
새로운 희망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진 않지만 다른 종류의 희망을 찾아 오늘도 새로운 루트를 찾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