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곤대다. 꼰대가 아닌 곤대다. 곤대는 아직 꼰대는 아니지만 꼰대로 익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나이로 치면 대충 30대 중후반쯤이요, 회사에서 직급으로 치면 대리 말년이나 과장쯤 된다. 회사에서 힘은 없는데 먹은 짬밥만 많다. 회사의 진짜 꼰대들은 나 같은 곤대에게 'MZ세대' 기강잡기를 주문한다. MZ세대의 정의에 따르면 80년대생인 나도 거기 포함되는데, 꼰대들 생각에는 아닌가보다. 그래서 곤대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 뜻은 이렇지 않지만 부장님이 싫어하셔, 자제해주면 안 될까". 회사 생활 동안 벌어둔 돈도 없고 힘도 없지만 기막히게 하나 배운 회피형 화법이다. 그렇지만 우리 MZ세대 후배들은 퇴근하고 한마디 뇌까리겠지 "아 오늘도 또 난리쳤어, 그 곤대, 답답해". 곤대는 직장 생활이 정말 힘들다.
오늘도 이렇게 가운데 끼어 진이 빠지는 회사 생활을 겪어낸 곤대. 그래도 퇴근 시간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곤대는 집에 가면서 이어폰을 끼고 뉴진스 '슈퍼 내추럴' 노래를 듣는다. 사실 곤대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종잡을 수 없이 세대를 건너뛴다. '슈퍼 내추럴' 다음 선곡으로는 갑자기 성시경의 발라드 노래가 나오고 대학 시절 좋아했던 밴드 버즈의 노래가 나오는 식이다. 그러다 눈물을 줄줄 뿜도록 '광석이형'의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곤대가 다양한 세대의 노래에 매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장님 감정에 맞추면서 '요즘 애들' 노래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휴 요즘 유행하는 것도 몰라요?" 소리를 듣기 싫달까. 아 근데 여기서 곤대는 뭔가 깨닫는다. 이 소리, 20년 전에 가요무대를 보던 아버지한테 곤대가 했던 말 아닌가. 왠지 돌고돌아 보복당하는 것 같지만 알 바인가, 다음다음 노래는 여자아이들의 신곡 '클랙슨'이다. 유행 공부를 안 하면 꼰대로 익어 버릴까, 우리의 곤대는 필사적이다.
곤대는 주말에 여자 친구를 만난다. 오래 사귀어온 곤대의 또래 여자 친구도 다를 바 없는 곤대다. 곤대는 회사 여자 후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얼굴이 벌게져서 화를 내는 여자 친구의 손목을 잡아끌고 우선 밥집부터 찾는다. 옛날엔 안 그랬지만 이제는 배부터 채우지 않으면 화가 치밀기 때문이란다. 여친 말로는 "당이 떨어져서" 그렇다나. 식사 메뉴도 오래 사귀어온 사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국밥집부터 찾는다. 그것도 아무 가게나 갈 수 없다, 시원하고 사람 없는 조용한 가게로 간다. 시끄러우면 골이 울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자 친구와 앉아서 '요즘 후배들'을 씹어대는데, 여친은 갑자기 곤대에게 "야 너 꼰대 다 됐어"라며 받아친다. 곤대는 순간 억울하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시켜서 한소리한 거뿐인데." 항변해본다. 그러나 여친의 막타(마지막 타격), "그런 걸 요즘 애들은 꼰대라고 해, 그냥 인정해". 곤대는 생각한다. 슈퍼 내추럴을 그렇게 열심히 듣는데, 결국 이렇게 꼰대로 푹 익어버리는 것일까.
여자 친구와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곤대는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멋진 중년이 되는 법’ ‘욕 안 먹는 모범적인 상사가 되는 법’ 등을 검색해봤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런저런 훈계성 영상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어느 영상도 말만 많지 딱히 답을 내려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영상 만드는 놈들도 전부 다 곤대인데 자기도 답을 모르겠지’ 곤대는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뒤척거리던 곤대는 결국 큰 결론을 내린다. ‘무슨 상관이야, 그냥 대충 살자. 다들 똑같은 마음이겠지’ 내려놓고 인정하고 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내가 꼰대든 곤대든 뭐든 간에 내일도 회사는 가야 하고 세상은 돌아가고, 나를 곤대라고 미워하던 후배도 어느 순간에는 곤대가 될 것이다. 끼어 사는 것 같은 감정이 힘들어도, 그냥 그러려니 참고 살자. 곤대는 취침용 음악으로 뉴진스의 슈퍼 내추럴을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