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았던 꿈
"지난 6개월도 증상이 한 번도 없었나요?"
"네."
"환자분은 여전히 약 줄여보고 싶어요?"
"... 네!"
"그래요. 그럼 이번부터 서서히 줄여보죠."
노의사는 내게 아침, 저녁 동일하게 각각 한 알씩 먹던 두 종류의 약 중 하나를 저녁에는 뺄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아침에 두 알, 저녁에 한 알을 먹으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사실 그가 한 말의 내용 대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내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단 하나의 단어는 그의 입에서 나온 "줄여보죠" 뿐.
엄마와 함께 그의 진료실을 나오고, 수납을 마치고, 병원 회전문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무너졌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안에서 흘러 내려왔다. 터져 나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아냈지만 눈물이 나오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병원에서 한걸음 한걸음 멀어질수록 마치 댐이 무너져 내리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쯤엔 나는 소리 내어 꺽꺽 울고 있었다. 곁에 있던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했다. 그저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내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드디어'였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조마조마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컨디션을 잘 관리해 온 결과, 드디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꾹꾹 억눌러 왔던 마음들, 숨죽여 왔던 마음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모두 터져 나오는 듯했다. 도저히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차 조수석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며 울었다.
이젠 다 잘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약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언제 울었냐는 듯 신난 목소리로 엄마에게 "우리 오늘 지인짜 맛있는 거 먹어요!"라고 할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그 첫 6개월 동안 나는 인생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진정으로 이해했다. 얻은 것은 약 복용량을 줄임으로써 그토록 염원해 왔던 목표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에 잃은 것은 지난 몇 년간 약을 먹음으로써 누려왔던, 이제는 내게 익숙해진 무증상의 안정감이었다. 저녁에 입에 털어 넣는 약이 한 알 뿐이라는 것이 행복했지만 매일 전과는 다른 긴장감에 휩싸였다.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하루를 감사일기로 마무리했지만, 증상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안정감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6개월은 무사히 흘렀다. 다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 나의 복용량은 아침에 한 알, 저녁에 한 알로 줄었다. 그날 병원문을 나설 때 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기뻤다. 마음 한편엔 불안함과 긴장감이 여전히 자리 잡고 고개를 불쑥불쑥 들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에 점점 무덤덤해졌다. 내 시야는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는 목표에 맞춰졌다. 그리고 또 다른 6개월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이제 남은 건 아침에 먹는 한 알 뿐이었다. 그날 정기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온몸에 묘한 떨림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저녁 7시 30분이 되면 '아, 약 먹어야 한다'하는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니.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해도 된다니. 이게 정말 현실인가? 꿈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병원을 다녀오고 2주 정도가 지난 주말 저녁, 나는 그 꿈에서 깨어났다.
자던 도중 발작을 했다. 내 방 근처에 있던 동생이 내가 발작하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왔다고 했다. 눈을 떠보니 가족 모두가 침대에 누워있던 내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날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나는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인데 왜 다들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누운 채로, 왜? 라고 물었다. 동생이 말했다. 누나 자다가 증상이 있었어. 동생은 '발작'이라는 단어도 쓰지 못했다.
멍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곧 그럴 리가, 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어.
4년이 넘도록 괜찮았는데?
하지만 가족들의 표정과 방 안의 공기가 내게 '그럴 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입을 닫은 채 천장을 바라봤다. 깜깜한 밖과는 달리 방안 천장등은 눈부시게 환했다. 반듯이 누워 있던 내 위로 이불이 가슴 위까지 가지런히 덮여 있었다. 발작이 끝나고 가족들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정리한 듯했다.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으로 흘러 들어간 눈물 때문에 귀가 축축해졌다. 내가 이불속에서 손을 꺼내 눈물을 닦지 않자 엄마는 "왜 울어..." 하며 내 눈물을 본인 소매로 닦아 주었다. 엄마도 울고 있었다.
며칠 뒤 급하게 잡은 외래 검진에서 나는 노의사와 상의 끝에 6개월 전의 복용량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내가 새로 이직한 회사 앞마당에서 발작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뒤 약 6개월 동안 단계적으로 다시 내가 원래 먹던 복용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의 꿈은 행복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나의 첫 번째 꿈은 그랬다.
뇌전증에 관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QnA #9
Q: 약을 정해진 시간에 먹는 것이 중요한가요?
A: 네, 맞습니다. 최상의 경련 조절을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투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약을 하루에 두 번 투약하는 경우에는 12시간 마다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한 번 투약하는 경우에는 주치의와 상담하여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기 전, 또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투약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출처: 서울아산병원)